진주성은 삼국시대에는 거열성, 통일신라시대에는 만흥산성, 고려시대에는 촉석성, 조선시대 이래로는 진주성 또는 진양성으로도 불렸다. 진주시를 가로지르며 도도하게 흐르는 남강 너머로 굳건히 서 있는 진주성은 예나 지금이나 견고하고 아름다운 모습이다. 논개의 절개와 김시민 장군의 기백이 여전히 살아있는 진주성 안으로 조심스럽게 한발 내디뎌 본다.
진주성 정문인 공북문은 손을 모아 가슴까지 들어 올려 공경한다는 공과 임금이 계시는 북쪽인 북을 뜻하는 북을 뜻해 “북쪽에 계시는 임금님을 향해 두 손을 모아 공경의 뜻을 표한다”는 의미를 가진 문이다. 입장료 2,000원이며, 주변에 주차시 시간에 따라 주차비가 추가된다.공북문을 지나니 가장 먼저 충무공 김시민 장군의 동상이 보인다. 김시민 장군은 1592년 당시 진주목사로 임진왜란의 한산도대첩, 행주대첩과 더불어서 3대 대첩으로 알려진 진주대첩을 승리로 이끈 장군이다.진주성은 언제 쌓은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고려 말에 왜구의 침입을 막고자 성을 다시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진주성은 임진왜란 때 우리에게 값진 승리를 안긴 역사적인 장소로 지금은 누구나 편하게 찾을 수 있는 공원으로 단장되어 있다.진주성 둘레는 1760m로 성곽 안엔 한적한 산책로가 있어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둘러보기 좋다. 성곽을 따라 돌며 산책하기 좋은 데다 성 안에 촉석루와 논개를 모신 사당인 의가사, 논개가 왜장과 함께 남강으로 뛰어든 의암, 국립진주 박물관 등 볼거리들이 많이 있다.성곽옆으로 대형총통이보이며, 두개의 비각이 보이는데, 임진왜란 당시 계사년 제2차 진주성싸움에서의 충정과 전공을 후세에 길이 전하기 위해 세워진 촉석정충단비이다. 또 다른 하나는 임진왜란 3대첩 중의 하나인 진주대첩을 이끈 주인공으로 이러한 공로를 돌에 새겨 기록한 김시민장군 전공비이다.촉석문방향으로 가다보면 호국의 종각이 있다.촉석문이 보인다.촉성문 밖으로 잠시 나갔다가 다시 들어 간다.국난 극복의 표상인 계사순의단은 촉석루 옆에 있다, 잠시 계사순의단에 참배를 한다.계사순의단은 제1차 진주성 전투(1592)와 계사년인 1593년의 제2차 진주성 전투 때 순국한 7만 군관민의 호국영령을 기리기 위한 제단이다. 특히 일본강점기 시절 당시 일본신사 자리를 허물고, 그곳에 지금의 계사순의단 자리를 만들었다고 하니 더욱 의미가 있다.진주성이 있는 남강변 벼랑 위에는 우아하고 위엄있는 촉석루입구다. 진주성에서 가장 유명한 곳으로 논개가 왜장을 끌어안고 남강에 몸을 던진 곳이다. 촉석루는 밀양 영남루, 평양 부벽루와 함께 우리나라 3대 누각 중 하나다.촉석루는 전시엔 전투 지휘소로 쓰이고 평상시엔 손님을 접대하며 연회를 열던 장소였다. 6.25전쟁 당시 촉석루가 폭격되어, 지난 1960년에 복원되어 예전의 원형을 옹글게 바라볼 수 없는 것은 아쉬운 곳이다.임진왜란 당시 촉석루의 역사적 깊이를 더하는 한 여인의 순절을 빼놓을 수 없다. 그 주인공은 바로 논개다. 촉석루 밑으로 암문을 통해 남강으로 나갈 수 있다.암문 밖 남강 옆엔 적장을 끌어안고 뛰어내린 논개의 행적을 적은 비문이 있고 네모난 의암을 볼 수 있다.논개가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몸을 던져 죽은 바위 의암이다.`진주 의암사적비`에는 의암에서 왜장을 껴안고 강물에 몸을 던져 죽은 논개의 행적을 기록한 빗돌이다.다시 진주성으로 들어 간다.촉석루 좌측으로는 `의기사`가 있다.사당 의기사(義妓祠)는 1593년 6월 제2차 진주성 전투가 끝난 후 일본군 장수를 껴안고 남강에 투신한 의기 논개의 영정과 신위를 모신 사당이다.의랑 논개의 비촉석루에 올라가 본다. 지금도 여러 시판이 걸려 있는 촉석루에는 일찍이 많은 묵객이 들렀던 곳이다.시원한 강바람이 불고 있었다. 강 너머 펼쳐진 진주 시가지는 많이 변해버린 듯했다. 논개가 몸을 던진 남강만이 변함없이 흐르고 있을 뿐이다. 외형적으로 도시는 급속하게 변해 왔지만, 역사라는 시간의 지층이 고스란히 쌓여 삶의 주변에 남아 있는 모습이다.의기사 담장과 붙어 있는 임진왜란 당시 나라를 위해 싸우다 전사한 성주목사 제말 장군과 그의 조카 제홍록의 충의를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 쌍충사적비(雙忠事蹟碑)이다.진주성 남강 절벽을 따라 쌓은 성곽은 절벽의 위엄을 한층 돋보이게 만든다.진주성 우물진주성 성벽을 따라 걷는 발걸음이 어느새 국립진주 박물관에 닿았다. 진주성의 고풍스러운 경관을 그대로 살린 채 주변 환경과 조화롭게 세운 건물이 돋보이는 공간이다.박물관 전시는 총 3부로 나뉘어 있다.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임진왜란이 일어나게 된 과정과 전쟁이 끝난 이후 동아시아와 조선 사회의 재편 과정들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이 밖에 조선과 명나라, 일본의 무기들을 비교해 놓은 전시도 눈길을 끈다. 화면 터치로 조작하는 인터랙티브 전시가 몰입도를 더욱 높여준다. 3D 영상관에서는 진주대첩의 전투 과정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든 영상물이 상영되며 이를 통해 진주대첩의 의의와 충무공 김시진 장군의 활약상을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다.임진왜란 당시의 무기와 임진왜란을 겪은 이들이 서술한 문서들이 박물관에 많이 전시되어 있다.진주성에서 가장 높은 망루인 서장대는 절벽 위에 위치해 서쪽을 감시하고 지휘하기 좋은 지휘소로 남강이 훤하게 내려다보인다.서장대에서 바라본 진주 도심.서장대에서 내려가면 임진왜란 당시 제2차 진주성전투에서 순절한 분들의 신위를 모시기 위해 선조40년(1607)에 건립된 사액 사당으로 정사호가 건립한 창렬사가 있다. 그 옆으로 고려말기에 왜구의 빈번한 침임을 막기 위해 진주성을 고쳐쌓고 승병을 양성하기 위해 세워진 호국사가 있다.북장대의 모습.진주성 사랑나무 연리목.청계서원은 고려병부상서로 거란의 침입을 물리친 진양부원군 은열공관전 정신열 선생과 고려 공민왕 13년 봄 이 땅에 목면 씨앗을 처음 심어 씨아와 물레, 베틀을 창제한 진양군 문충공 퇴헌 정천익 선생을 모신 곳이다.진주성 북장대로 다시 올라간다.진주성 북쪽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하여 낭떠러지 밑의 성 밖은 물론이고 성내와 외성에 포진한 병사까지 지휘 할 수 있는 요지에 세워진 북장대는 군사건물의 모범이라 할 만큼 잘 건축된 망루이다.진주성 한켠에 흐트러져 있는 돌무더기들은 용다리의 전설을 담고 있다.진주성 비석군경절사는 고려조 충절신 하공진 장군의 영정과 위패를 봉안하고 항례를 올리는 곳이다.진주성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건물로 조선시대 경상우도 병마절도영의 문루인 영남포정사 문루는 진주목시대에는 진주성 내성의 관문이었고 고종 32년(1895) 관찰부가 설치될 때는 진주관찰부의 관문으로 영남의 정사를 선포하는 행정중심지를 뜻하는 말로 “영남포정사”라는 현판을 내걸었다.진주성의 고즈넉한 성곽길, 역사가 살아 숨 쉬는 문화재, 조선 3대 누각으로 꼽히는 촉석루, 유유히 흐르는 남강변 등 멋진 경관을 감상하면서, 선조들이 오로지 나라를 구하고 삶의 터전을 지켜내고자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렸던 역사의 현장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하루하루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 새삼 깨닫게 하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