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라남도 여행

장흥 도림사

2024년 12월 31일

10여년전 가지산 등산후 도림사를 관람하면서 명부전에 사후세계를 담은 벽화의 지옥이 많은 생각을 하게끔 하였다. 그때는 죽어서 어떻게 되든 뭔 상관이야 하였는데 다시 찾아와 자세히 보기로 한다. 보림사는 장흥을 빠져나가는 길목에 자리하고 있다. 장흥에서 나주 방면으로 23번 국도를 따라가다 820번 지방도로를 올라타면 얼마 가지 않아서 도착한다.

 

 

 

보림사는 장흥군 유치면 가지산 계곡에 위치한 고찰로 동양 3보림 (인도·중국·한국)중의 한 곳이며 신라시대에 선종이 가장 먼저 들어와 정착된 선종의 종찰로 현재는 송광사의 말사다. 구산선문을 알리는 일주문이 계곡입구에 있다.
보림사도 창건 당시엔 깊은 산중이었겠지만 지금은 절간 담장 앞까지 차로 갈 수 있다.
대찰의 풍모는 넓은 절터로 확인된다. 6.25전쟁으로 전각은 불에타서 절 마당이 광장이라 해도 될 정도로 넓고 휑하다.
외호문 우측으로 비자림 잎구에 엽전 모양의 청태전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이는 보림사에서 나는 야생녹차를 엽전 형태로 뭉친 ‘청태전’을 나타낸 것이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차는 장흥이 자랑하는 ‘청태전’의 원료로 대접받고 있다. 숲은 비자림이지만 주인공은 차나무인 셈이다. 숲길의 명칭도 '청태전 로드'다. 산책로는 가지산(510m) 정상까지 연결된다.
일주문 역활을 하는 외호문.
보림사의 외곽은 외호문(外護門)이라 이름 붙여진 일주문을 기점으로 담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선종대가람(禪宗大伽藍)이란 일주문 속의 현판이 우리나라에서 선종이 처음 시작된 보림사의 속성을 그대로 드러낸다. 외호문 입구에서 안으로 들여다보면 천왕문 지나 두기의 삼층석탑과 석등까지 일직선으로 놓여 한 눈에 들어온다.
이 절은 서기 759년 경, 원표대사가 이곳에 절을 세워 가지사라 하였는데 이후 도의선사와 염거선사를 거쳐 구산선문 중 가지산문의 법맥을 이어받은 체징(體澄)혹은 지선(智詵)에 의하여 '보림사'라는 이름으로 재 창건된다. 근세에 이르러 6.25 전쟁이 나면서 국보 제204호였던 대웅전 등 20여 동의 건물이 불타고, 천왕문과 사천왕·외호문만이 남았던 것을 최근 들어 중창하였다.
외호문 지나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사천왕상이 지키는 천왕문 천왕문 들어서면 다른 절에서 보다 훨씬 큰 사천왕이 문을 지키고 있는데 지금까지 조사된 조선시대 사천왕상 가운데 조성 년대가 가장 빨라 임진왜란 이전의 것으로는 유일한데 천왕문에 걸려 있는 목판의 (보림사천왕금강중신공덕기)에 의하면 중종 10년(1515)에 조성되었고 이후 1666(8)년과 1777년 2차례에 걸쳐 중수되었다고 한다.
1995년 2월에 보림사 사천왕상의 몸 안(무릎과 발등)에서 국보급 희귀본인 월인석보 제25권을 비롯하여 고서 250여권이 발견되어 당대의 인쇄문화와 언어, 사회상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천왕문을 들어가면 절 마당 한가운데 석탑 뒤로 대적광전, 우측으로 대웅보전이 건립되어 있다.
좌측으로 박물관이 있으며,
보림사 뒤쪽으로는 울창한 비자나무 숲이 있다. 300년이 넘은 비자나무 500여 그루가 군락을 이루고 있고 참나무와 단풍나무, 소나무도 많이 서식해 있다. 이 숲은 1982년 산림유전자원보호림으로 지정됐다.
대적광전 앞, 1가람 2탑 양식에 맞추어 서 있는 2기의 삼층석탑과 석등(국보 44호)이 내 시선을 잡아끈다.
남탑이 5.4m, 북탑은 5.9m, 석등의 높이는 3.12m인 이 통일신라시대의 석탑과 석등은 1934년 해체, 복원할 때 나온 탑지로 탑의 조성연대(870년, 경문왕 10년) 및 중건 사실이 밝혀져 다른 석탑의 건립연대를 추정하는 데 하나의 기준이 되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
탑 뒤의 대적광전은 1995년 발굴 조사를 거쳐 복원하였다.
대적광전에는 858년에 제작된 국보 제117호,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이 모셔져 있다. 광배와 대좌를 모두 잃어버리고 불신만 남아 있지만 신라 하대 9세기 불상을 특징짓는 기준작품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조성연대가 확실한 이유로 석탑처럼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보림사 삼성각
요사채
대웅보전 앞에 놓인 두 쌍의 오래되고 키 작은 당간지주가 세월의 흔적만큼 늙어 보인다. 불타 없어진 자리에 새로 지은 대웅보전은 그 옛날의 규모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는 큰집이다. 이와 더불어 창성했던 시절, 1000 여명의 승려들의 수도처 였음이 과장이 아닌 듯 보림사의 절 마당은 아주 넓은 편이다.
발길을 돌려 대웅전 뒤편의 세 칸 짜리 맞배지붕을 가진 미타전에 오른다.
조사전
미타전에는 아미타여래석불입상 한 구를 장흥 제암산 의상암지에서 이곳으로 옮겨 놓았는데,
민머리 위에 상투 모양의 머리를 하고 타원형의 얼굴을 하고 있다. 법의는 양어깨를 다 감싸고 있으며 U자형 주름이 가슴까지, 양팔의 주름은 무릎까지 내려와 있는 통일신라 후기의 작품이다. 그런데 이 석불입상 옮겨 놓으며 눈썹을 그리고 입술에는 아주 붉은 루즈를 칠해 놓아다. 세월 묵은 그대로 두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미타암 지나 보조선사 부도탑 가는 길, 담장안으로 요사채가 있다.
보조선사창성탑비(보물 제158호)는 보조선사 지선의 탑비로서, 그가 입적한 뒤 4년만인 884년에 사리탑과 함께 조성되었다. 이 비는 비신과 귀부·이수를 모두 갖춘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다.
탑비 위에 보조선사창성탑(보물 제157호)이 있다. 대체적으로 파손이 심하여 아쉬움을 주는 데 두 단으로 이루어진 하대석 아래에는 안상이 위에는 사자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굄대 위의 중대석은 약간 볼록한 팔각의 형태로 각 면에는 사각형에 가까운 안상이 만들어져 있고 게다 3중의 안상 형태를 보이는데 이런 양식은 다른 부도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고 한다.
대웅보전 옆의 아담한 전각은 명부전이다. 검은색 용이 지붕에 내려앉아 풍기는 기운이 강렬하다. 명부전은 사후세계를 담은 전각으로, 지장전으로도 불린다.
명부전 내부에는 지장보살을 모셔놓았으며, 주변에 염라대왕을 비롯해 열명의 시왕이 있다.
외벽에 그려진 것은 지옥도다. 10여년전에는 채색이 께끗하여 선명하게 보였는데, 세월의 흔적으로 빛이 바랬다.
지옥도 벽화는 간지(10간과 12지를 조합한 말. 10간은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이며, 12지는 자(쥐)·축(소)·인(호랑이)·묘(토끼)·진(용)·사(뱀)·오(말)·미(양)·신(원숭이)·유(닭)·술(개)·해(돼지)이다.)를 표시하여 자신의 생년에 따라 어떤 지옥으로 갈 것인지 이미 정해졌다.
검수지옥(칼이나 있는 나무에 던지는 지옥), 발설지옥(혀를 빼어 쟁기로 밭을 가는 지옥), 독사지옥(독사 구덩이에 던져 버리는 지옥)등이 그려져 있다.
각기 다른 형벌을 받는 오차, 기아, 분시니 등 10대 지옥이 생생하다. 현생은 순간의 모음이고, 수많은 선택의 결과 값이다. 그러니 현실에 충실하되 허튼 생각을 하지 말라는 성인의 꾸짖음이 보림사 너른 경내에 메아리치는 듯하다.
보림사 범종구.
보림사 마당 한가운데에 뜬금없이 약수터가 자리 잡았다.
사각의 샘터에서 솟아나는 물이 맑고 차다. 한 바가지 떠서 목을 축이는데, 송사리가 헤엄치고 다슬기도 보인다. 청정수에만 서식하는 어종이라니 오히려 수질을 보증하는 징표다. 1980년 한국자연보호협에서 ‘한국의 명수’로 지정해 ‘보림약수’로 불린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
보림사 명부전 외벽에 그려진 지옥도를 다시 한번 생각한다. 아무리 발부둥친 들 이미 정해진 지옥으로 간다.

 

'전라남도 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남진 전망대  (2) 2025.02.06
방촌유물전시관  (0) 2025.02.06
곡성 용산재  (1) 2024.12.06
선암사  (1) 2024.12.02
화순적벽  (6) 2024.1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