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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 여행

세병관

2025년 2월 21일

경남 통영이 역사 속에 등장한 것은 조선 중기 임진왜란이었다. 조선 수군의 근거지인 ‘삼도수군통제영’이 들어서면서다. 통영이라는 지명도 통제영의 준말에서 나왔을 정도다. 통영이라는 도시는 조선 선조 36년(1603년) 제6대 통제사였던 이경준이 통영성의 중심이었던 지금 자리로 옮겨오면서 시작한다. 통제영은 고종 32년(1895)까지 292년간 유지되다가 일제강점기 민족정기 말살정책에 의해 세병관을 제외한 대부분의 건물이 사라졌다가 근래에 통제영터 일부를 정비 복원했다.

 

 

 

항아리처럼 바닷물이 둥그렇게 파고든 통영항을 지역에서는 강구안이라 부른다. 강구안에서 시장 골목을 통과해 약 400m만 걸으면, 문호동 여황산 기슭에 ‘삼도수군통제영’이 있다. 삼도수군통제영은 지금으로 치면 해군 총 사령부 격이다. 우측의 익살스러운 모습의 `벅수`가 반긴다.
통영 문화동 벅수 옆으로 삼도수군통제영역사관이 있다. `벅수`는 경계를 나타내거나 거리와 방향을 알려주는 이정표였으며, 민간신앙의 일종으로 잡귀의 출입을 막는 수호신 역할을 했다.
세병관으로 가는 오르막 좌측으로 응수헌, 중영청 안으로 들어가는 솟을삼문이 보인다. 중영지 구역에는 중영청(정4품 무관의 군영)을 비롯해 좌우행랑과 중영부속채, 외삼문 등을 복원했다.
계단 끝에 망일루 가 보인다. 망일루에 들어 가기전 입장료를 내야한다. 입장료 3,000원.
망일루 누각 밑으로 들어가면 좌측으로 산성청이 있으며,
우측으로 좌청이 있다.
좌청에서 우측으로 `통영 두룡포 기사비각`이 보인다.
통영 두룡포 기사비는 조선 선조 때 이경준이 세운 것으로, 수군의 본영을 이곳에 건설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통영두룡포기사비각 주변에 이씨 문중 배출 삼도수군통제사 14명 중 9명의 비석을 보관하고 있다. 2014년 11월 7일 통영시 무전동 873번지에 묻혀있던 것을 발굴하였는데, 이는 이례적인 일로 매몰 이유도 불명확하다. 사적비.청덕선정비.불망지 등등 총 24기의 비석이다.
세병관 출입문인 ‘지과문’. 그칠 지(止) 전쟁 과(戈), 즉 전쟁을 멈추는 문이다. 이 문을 지나면 비로소 세병관에 이른다. 조선 시대 한강 이남 최고의 관청으로 평가되는 세병관의 지과문. 세병관은 충청 전라 경상을 아우르는 삼도수군통제영의 본영으로 삼도의 문화가 오갔던 장소다.
지과문에서 내려다 본 전경이다.
지과문을 통과하면 널찍한 마당에 웅장한 건물 세병관이 위용을 자랑한다. ‘세병관(洗兵館)’ 현판만 해도 어른 키를 훌쩍 넘는다. 제137대 통제사 서유대가 썼다. 은하수를 끌어와 병기를 씻는다는 의미의 만하세병(挽河洗兵)에서 따왔다. 전쟁 없이 평화가 지속되기를 바라는 염원을 담고 있다. 넓은 마루에 열을 지어 세운 아름드리 기둥이 궁궐의 회랑 못지않다. 경복궁 경회루, 여수 진남관과 더불어 국내에서 가장 규모가 큰 목조건물이다.
세병관은 선조 38년(1605년) 1월에 기공해 그해 7월 14일에 준공한 통제영의 객사다. 조선시대 객사는 절대왕권을 상징하는 건물로 읍성의 가장 중요한 자리에 위치했다. 이곳에서 통제사와 장군들은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임금이 계신 곳을 향해 절을 하는 의식을 했다. 정면 9칸, 측면 5칸의 단층으로 된 웅장한 건물이다. 모든 칸에는 창호와 벽체를 만들지 않고 통칸으로 개방했다.
세병관은 17세기 목조단층 건물로, 그 역사성과 학술적·예술적 가치의 탁월함을 인정받아 2002년 국보로 지정됐다.
세병관 우측 답장 앞으로 `석인`이 보이는데, 숙종 27년(1701 년) 제 77대 류성추통제사 때 세병관 뜰에 액막이로 만든 석인으로 추측되며, 세병관 앞 장석대 석축 해체 과정에서 석인 5기가 발굴되어 현재의 위치에 설치하였다.
세병관 우측으로 내아군으로 가는 중문을 통과하면 비석들이 줄지어 도열한 모습이 보이는데, `통제사비군`은 역대 통제사들의 공덕을 기리는 비석이 시내 일원에 흩어져 있던 것을 현 위치에 모아서 세워 놓은 것을 말한다.
세병관 우측으로 내아군이 자리하는데, 통제사가 업무를 보던 영역이다.
통제사가 사무를 보는 운주당 내삼문 안으로 들어가면 좌측으로 병고가 있는데,
병고는 선조 36년(1603) 제6대 이경준 통제사때 통제영 설치와 함께 세워졌다. 통제영 병고는 당시에 화폐 기능을 하였던 옷감이나 베나 무명을 보관하다가 통제영 말기에는 금전 출납만을 하였다.
운주당은 인조 23년 (1645년) 제21대 이완 통제사 때 경무당과 함께 창건하였다. 운주는 `운주유악지`중에서 나온 말로 군막 속에서 전략을 세운다는 것을 말함이니, 즉 통제사가 통제영 군무를 보는 집무실이다.
운주당 내부에는 팔사품이 전시되어 있다.
통제사가 거처했던 지방관청의 안채에 해당하는 내아다.
운주당, 경무당, 내아의 전경.
세병관은 화폐를 발행하는 주전소까지 있었다.
세병관 후원
통제영을 사이에 두고 좌우에 작은 봉우리가 통영시가지를 내려다보고 있다. 그 가파른 언덕에 벌집처럼 다닥다닥 살림집이 빼곡하게 들어섰다. 동쪽 벼랑의 동피랑, 서쪽 벼랑의 서피랑이다. 달동네의 축대와 담장마다 알록달록한 벽화가 그려지고, 좁은 골목을 양쪽으로 들어선 민가가 전망 좋은 카페와 공방, 기념품 가게로 변신했다. 언덕 꼭대기에는 동포루가 복원됐다. 숙종 20년(1694)에 세운 통영성의 초소 겸 망루다. 낮은 성벽 너머로 눈부신 쪽빛 바다와 아담한 포구가 정겹게 내려다보이는 곳이다.
동포루와 쌍을 이루며 언덕 꼭대기에 서포루가 복원돼 있는데, 이곳에서도 통영 시내가 시원하게 내려다보인다. 서포루 넘어에는 미륵산이다.
세병관 왼쪽 뒤쪽으로 난 문을 지나면 ‘통제영 12공방’과 백화당이다. 조선 수군 최고의 핵심 군사시설이었던 통제영은 전국의 물산과 장인이 몰려들었다. 조선시대 군영과 읍성에는 공방이 있었다. 이들은 군수품 생산은 물론 조정에 보내는 진공품과 중국 사신의 헌상품까지 조달했다. 이런 환경 속에서 탄생한 것이 바로 ‘12공방’이다.
공방지 구역에는 백화당(통제영 접견실)과 잉번청(업무실), 공내헌(12공방 집무실), 동개방(활·화살 제작), 야장방(철물 주조)이 들어섰다.
석수조는 물을 저장하여 자개등을 갈고 닦는 등의 작업을 하던 곳이다.
쇠를 녹여 화살촉, 칼 등 병기 및 각종 철물을 주조하던 야방장.
`삼도수군통제영 고지도`로 조선시대 삼도수군통제영 소속 함선들이 정박해 있는 모습이 그려진 통영 고지도다.
아전들의 사무실 잉번청.
1604년경 통제영 창건 당시 심었다고 전해지는 느티나무로, 1872년 통영지도 세병관 옆에 그려져 있다. 나무의 둘레는 5m 정도로 수령은 400년 이상 추정된다.
중영지 구역.
1592년 왜적의 침략으로 나라의 존망이 위기에 빠졌을 때 이순신 장군이 통영 앞바다에서 초요기를 달고 학익진을 펼쳐 왜적함대를 격파한 한산도대첩 이후 비록 이순신 장군 사후에 건설된 통영이지만, 이순신 장군의 위상과 위대함을 후대에게 알리기 위해 설치된 세병관에서 바라보는 통영 바다가 다른 자태로 감동을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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