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이 2014년 6월 카타르 도하에서 개최된 유네스코 총회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신규 등재되었다는 소식에 그해 겨울에 남한산성 본성 성곽을 따라 약 7km 를 답사하고 간적이 있었다. 오늘은 남한산성 행궁을 중심으로 공부를 하여 본다.
남한산성에는 동문(좌익문), 서문(우익문), 남문(지화문), 북문(전승문) 등 네 개의 성문과 수어장대, 남장대터, 현절사, 지수당 등 다양한 유적이 있다. 남한산성 좌익문에서 출발을 한다.동문을 출발-동장대터-북문-남한산성행궁-지수당-동문으로 돼 돌아오는 코스를 잡는다. 동문옆으로 승용차기준 21대의 주차공간이 있다.동문은 산성 남동쪽에 위치한다. 이 문은 '좌익문'이라고도 한다. 행궁을 중심으로 국왕이 남쪽을 바라보며 국정을 살핀다고 하면 동문이 좌측이 되기 때문이란다. 동문에서 동장대터 방향으로 간다.남한산성은 경기도 광주·성남·하남 등 3개 도시에 걸쳐 있다. 북한산성과 함께 한양의 남과 북을 지키는 2대 산성이었다. 성남(城南)이라는 명칭의 유래가 된 곳이기도 하다.북한산성이 있는 북한산과 달리, 남한산성이 자리한 산 이름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는데, 남한산성은 수어장대가 있는 청량산(해발 483m)과 남한산(해발 522m)에 위치해 있다. 남한산은 임시 궁궐인 행궁이 지어질 정도로 내부가 넓은 분지로 되어 있고, 외부는 험한 경사를 이뤄 천혜의 요새지로 평가받았던 곳이다. 그만큼 우리나라의 큰 전쟁에 자주 동원된 곳이라 슬픈 역사가 많은 곳이기도 하다.남한산성은 백제의 온조왕 때에 처음으로 축성된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그 후 1624년(인조 2) 서울의 중심부에서 동남쪽으로 25km 떨어진 곳에 축성을 시작해 1626년에 완공했다. 평균 고도 해발 480m 이상으로 험한 산세를 이용해 지형적으로도 방어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곳으로 둘레가 12km에 이르며 산 위에 도시가 위치할 수 있을 만큼 넓은 분지로 임금과 조정이 대피하는 조선시대 보장처로 지었다. 완공 10년 뒤인 1636년 병자호란 당시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다.산성은 크게 포곡식(包谷式) 산성과 발권식(鉢圈式) 산성으로 나뉜다. 포곡식 산성은 산기슭에서 시작해 능선을 따라 정상 가까이 축조한 성곽이다. 계곡을 하나 이상 포함해 성내 가용면적을 넓히고 수원을 포함해 평소 주민들이 거주하거나 지구전으로 이어질 경우 용이하도록 쌓은 것으로 북한산성, 남한산성 등이 대표적인 포곡식 산성이다.성곽길을 걷다보니 장경사가 나온다. 남한산성이 대대적인 보강 공사에 들어간다. 전국에서 징발된 백성 가운데에는 승려도 포함되어 있었다. 장경사는 그렇게 남한산성 보수 공사에 교대로 동원된 전국의 승려들이 먹고 자고 머무는 공간으로 창건된 사찰이다.좌측으로 군포지가 있던 곳이다. 군포지는 성을 지키기 위한 초소 건물으로 125개소의 군포가 있었다고 하며,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건물이였다.제 2 암문으로 적의 관측이 어려운 곳에 설치한 문으로 일종의 비밀 통로다.암문으로 통해 `장경사신지옹성`으로 나갈수 있다. 옹성은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성문 밖으로 한 겹의 성벽을 더 둘러쌓은 이중의 성벽을 말한다.좌익문에서 1.5km 정도에 위치하고 있는 동쪽의 장대인 `동장대`는 지금은 터만 남아 있으며, 지휘와 관측을 위한 군사적 목적의 누각이 있던 곳이다.군포지를 지나서동장대에서 북문방향으로 가다보면 제 3 암문(봉암성 암문)이 나온다.암문 밖으로 나오면 봉암성으로 가는 길이 보인다. 봉암성 외성은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 방어의 취약점을 보완하고자 1686년(숙종 12) 남한산성 본성 동쪽에 새로 쌓은 성이다.산과 숲 사이 방어를 위해 지은 성곽은 현대인들에겐 걷기 좋은 산책로이자 지역을 한 눈에 담을 수 있는 전망대 역할을 톡톡히 한다.옥정사지 암문(제 4 암문)굴곡지며 오르내리는 산성은 모습이 한 폭의 그림 같아 휴대폰 셔터를 연이어 눌러본다.북문이다. 이 문을 통해 과거 세곡을 운반했다고 한다. '전승문'이라고도 불리는데 정조 때 성곽을 개보수하면서 붙인 이름이다.북문 바깥으로 나가면 성곽 안에서 파악하지 못한 성벽의 웅장한 자태가 드러난다.북문에서 음식점과 카페가 즐비한 골목길을 따라 행궁을 찾아간다.종각 좌측 계단으로 오르면 침계정이 있다.300년이 넘은 느티나무 옆에 침괘정이 있다. 수어장대와 함께 백제 온조왕의 왕궁지로 전해지고 있는 침괘정은 조선시대에는 무기 제작소의 사무를 관장하던 곳이라고 전해진다.침괘정에서 바라본 전경으로 만해기념관, 객사, 남한산성역사문화관 등이 자리한다.남한산성 행궁은 임시수도의 위엄을 간직한 공간이다. 인조 4년(1626년)에 건립된 이곳은 국내에서 유일하게 종묘와 사직을 함께 갖춘 행궁으로, 유사시 임시수도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었던 점에서 역사적 가치가 크다. 현재는 내행전, 외행전, 한남루, 좌승당 등 주요 건축물이 복원되어 있다. 행궁 입장료는 2,000원, 경기도민은 무료다.행궁 정문인 한남루를 통과하여 안으로 들어가면,외삼문을 거쳐 정사를 논하는 궁궐의 중심 건물인 외행전, 임금의 처소이자 생활 공간인 내행전으로 이어진다. 가파른 계단과 기다란 담장, 방향이 조금씩 틀어진 문을 차례로 통과하는 구조다.정사를 논하는 궁궐의 중심 건물인 외행전.외행전 뒤 내행정으로 들어가는 문.임금의 처소이자 생활 공간인 내행전.내행전 좌측의 모습으로 문을 통해 나가면 좌승당이 나온다.상궐 내행전의 북쪽, 담장밖에 좌승당은 광주부 유수(유수 심상규)의 집무용 건물이다.내행정 뒷뜰의 모습.내행전 뒤에는 수신 공간인 재덕당.재덕당 옆에는 반석(磐石)이라고 새겨진 큰 돌이 있다. 행궁 건립 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지만 내력이 알져지진 않았다. 다만 한양이 적의 침입을 받더라도 남한산성이 나라를 다시 일으킬 수 있는 근거지이자 초석이라는 의미로 세워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행궁 후원 정자 이위정.임금과 왕가의 신주를 모신 정전과 영녕전은 담장 바깥에 따로 자리를 잡았는데 뒤편 솔숲이 그윽하다.행궁 후원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왕이 이곳으로 피신했으나,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삼전도에서 청나라에 항복하는 굴욕을 당했다. 남한산성은 단순한 돌담이 아니다. 백제 시대부터 조선 후기까지 이어져 온 군사·행정의 중심지이자 병자호란 당시 47일간 항전이 펼쳐진 역사적 무대다. 국가의 흥망과 민중의 고난, 나라를 지키려 했던 굳센 의지가 고스란히 서린 살아 있는 기록물이다.행궁에서 남한산성의 대표적인 읍치 시설을 찾아간다.광주부의 읍치를 산성 안으로 옮겼기에 행궁과 함께 많은 관아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인화관은 행궁의 객사 건물이다.산성로터리에서 동문방향으로 내려가다 보면 좌측 언덕에 연무관이 보이는데, 연무관은 군사들이 무예를 연마하던 곳으로 그중에 무예가 뛰어난 사람은 한양으로 보냈다고 한다.지수당은 1672년(현종 13) 광주 부윤 이세화가 엄고개에 주정소를 새로 지으면서 폐목재를 옮겨와서 건립하였는데 정자를 가운데 두고 앞뒤로 연못이 3개가 있었으나 정자와 연못 2개는 남아 있고 연못 하나는 밭으로 변했으며, 남학명이 지은 `지수당기`에 “백성을 포용하고 기른다”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