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칠백의총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이끌었던 조헌과 영규대사를 비롯한 700여 의병들이 장렬히 싸워 순절한 유골을 안치한 묘소다. 그들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조성된 곳에서, 엄숙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역사의 의미를 되새겨 본다.
칠백의총은 충남 금산군 금성면 의총길 50에 위치하고 있으며, 칠백의총주차장 전면에 칠백의총기념관이 자리하고 있다. 주차비, 입장료 없음.칠백의총기념관은 임진왜란 당시 충남 금산에서 싸운 칠백의사의 충절을 국민에게 알리기 위해 건립해 칠백의총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 조헌 선생과 승장 영규대사가 이끄는 700여 명의 의병이 충남 금산 연곤평에서 1만5000여 명의 왜적과 싸우다 모두 순절하자 그분들의 유해와 의로운 넋을 함께 모셔놓은 곳이다.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돼 있다.전시공간은 크게 2개 전시실로 구성했다. 1전시실은 임진왜란의 개요와 1592년 7~8월 사이에 있었던 1차‧2차 금산전투의 전개 과정, 의미, 전후 칠백의총의 조성과정을 소개하는 공간이다.`선조실록` 1592년 8월 24일에 실려 있다. 선조가 '청주를 다시 빼앗았다는 것이 정말인가?' 하며 기뻐하자 윤두수가 '조헌이 승장과 함께 진격하여 함락시켰다고 합니다'라고 답변한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은 9월 12일 자 실록은 '영규와 조헌이 군사를 옮겨 금산의 왜적을 치다가 모두 싸움터에서 죽었는데 지금도 사람들이 매우 애석해 하고 그들의 의기를 장하게 여기고 있다'라는 기록을 볼 수 있다.임진왜란 당시 관군, 의병의 복식과 무기.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 조헌선생은 금산 일대의 백성들로 구성된 의병을 조직했다. 8월1일 승병장 영규대사와 함께 청주성을 탈환했고, 다가올 18일에 당시 관군을 이끌었던 호남순찰사 권율장군과 금산의 적을 함께 공격하기로 약속했다. 그런데 결전의 날은 곧 비극의 날이 되고 말았다. 먼저 왜적의 기세를 확인한 권율장군은 아군이 절대적인 열세라 판단해 작전을 연기하자는 편지를 조헌선생에게 띄웠으나, 조헌선생은 미처 이 소식을 전해 받지 못한 것이다. 결국 8월18일, 조헌선생의 의병부대는 1만5,000명 왜군에 맞서 싸우다 단 한 명의 생존자도 없이 모두 전사했다.금산전투의 경위와 조헌을 비롯한 순절한 인물들에 대한 추모 헌사를 적어 1603년 세워진 '조참판일군순의비'(趙參判一軍殉義碑)는 1940년대 일제에 의해 폭파됐다가 2009년 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재보존과학센터가 복원한 비석으로 순의 복원 체험을 할 수 있다.2전시실은 고경명, 조헌, 영규대사 등 당시 전투를 이끌었던 의병장들에 대한 소개와 관련 유물이 전시하며 함께 싸웠던 칠백의사와 승병들에 대한 추모공간으로 구성했다.승병장 영규대사(?~1592)와 승군 800명은 청주성을 탈환한 뒤 조헌이 이끄는 의병과 금산에서 왜군과 싸우다 장렬히 전사했지만 유생 등 의병 700명만 칠백의총에 모셔 불교계와 학계에서는 승군 800명을 포함해 천오백의총으로 바로잡아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선조실록'을 보면 신점은 선조에게 "영규라는 자가 300명을 불러 모으고서 '우리가 일어난 것은 조정의 명령이 있어서가 아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는 자는 나의 군대에 들어오지 말라'고 하니, 중들이 다투어 스스로 앞장서서 거의 800에 이르렀는데 조헌과 함께 군사를 합해 청주를 함락시킨 자가 바로 이 중이라고 합니다"고 아뢨다.`정기록`은 1차 금산전투 당시 순절한 고경명의 격문과 서한 등을 모아 아들 고용후가 1599년(선조 32년) 펴낸 책이다. 칠백의총기념관 소장본은 19세기 이후 인쇄본으로 보인다.
'선조수정실록'에도 의병장 조헌이 금산전투에 의병 700명을 이끌고 참전하자 영규대사는 조헌을 혼자 죽게 할 수 없다며 승려 수백명을 데리고 함께 싸워 모두 전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에서는 영규대사가 청주전투를 지휘하고 계획했다고 적고 있다.임진왜란 당시에 시대적 상황이 온전한 관군중심의 국가 방어체계를 갖추지는 못하였기 때문에 의병들이 아무런 대가도 없이 오직 내 삶의 터전인 국가를 우리가 직접 지킨다는 대승적인 희생정신이 고스란히 물들어 있어, 더 가치가 있는 역사 이야기라 할 수 있다.국가의 위기 상황 속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희생하였던 칠백의사의 이야기에 대해 공감하고 그 정신을 기억하며 계승할 수 있는 전시실을 관람한 후 기념관 옥상으로 올라가 본다. 옥상에는 쉼터를 조성해 놓았다.기념관옥상에서 바라본 금산통신위성기지국.기념관을 지나서 숭의마당에 서면 칠백의총 홍살문이 보인다. 이곳에서 부터는 성역으로 경의를 표하라는 뜻이다.홍살문안으로 들어가면 전면에 의총문이 보이고,우측으로 연못 숭의지가 있다. 연못에 다가가니 인기척에 비단 잉어들이 몰려온다.칠백의총 정문에서 종용사로 들어서는 도중에 만나는 첫 문으로 칠백의총의 외삼문에 해당한다. `의총문`은 전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로서 지붕은 맞배 지붕 철근 콘크리트조로 지어졌다.외삼문인 의총문(義塚門)으로 입장한 후 오른쪽으로 접어들면 `중봉조선생일군순의비`가 있다.사적비인 '중봉조선생일군순의비'를 보호하는 순의비각 안에는 의병장 조헌선생이 이끄는 칠백의사가 청주성을 탈환하고 금산 연곤평 싸움에서 순절하기까지의 사적을 기록한 비문이다. 임진왜란 11년 후(1603년 4월)당시 해평부원군이었던 윤근수가 글을 짓고 김현성의 글씨로 새겨 건립한 것이다.'중봉조선생일군순의비'는 일제강점기에 금산경찰서장 “이시까와 미찌오”에 의해 폭파되었던 것을 주민들이 일제의 눈을 피하여 땅속에 묻어두었다가 8·15 광복 이후 파내어 보관하여 오던 중 1971년 경역 확장 시 그 폭파된 비를 붙여서 비각을 세우고 보존하여 내려왔다. 2009년 9월에 분리된 상태로 비각 안에 있었던 몸체와 머릿돌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여 다시 세웠다.순의비를 보고나서 내삼문인 취의문(取義門)을 바라본다.`사당 종용사`는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종용사를 헐고 순의비를 폭파한 후 칠백의총의 토지를 강제로 팔아 경역을 황폐하게 만들어 항일 유적을 말살하려 하였다. 광복 후 1952년에 군민들이 성금을 모아 의총과 종용사를 다시 지어, 순절한 칠백의사의 숭고한 호국정신을 이어받게 하고 있다.`종용사`는 임진왜란 당시 금산 싸움에서 순절하신 선열들의 영혼을 모신 21위의 위패가 안치되어 있다. 1647년 당시 호서·호남지방의 유림에 의하여 사당이 건립되었고, 1663년 현종께서 “종용사”라 사액하셨다.순절하신 영혼을 모신 위패가 안치되어 있는 종용사 앞에서 묵념을 한다.칠백의총(사적 제105호)은 임진왜란 당시인 1592년(선조 25년) 왜장 고바야카와의 1만5천여 왜군과 싸우다 순절한 의병장 조 헌 선생과 영규대사, 칠백의사의 유골을 안치한 곳으로, 왜적과 싸우다 모두 순절하자 그분들의 유해와 의로운 넋을 함께 모셔놓은 곳이다. 민족의 빛나는 호국정신의 상징이자 그 숭고한 가치를 가슴에 새겨야 할 뜻깊은 유적이다.칠백의총을 관람을 하고 칠백의사순의탑으로 향한다. 칠백의사의 거룩한 뜻을 영원히 지켜가고자 칠백의총과 마주보는 위치이며 전적지인 연곤평이 내려다보이는 위치에 건립하였다.13.8m의 탑신 전면에는 “칠백의사순의탑“이라 새겼고 탑신 하부는 화강암에 용이 새겨져 있으며, 탑신 상부에는 동으로 만든 창과 방패가 장식되어 있다.`칠백의총`은 1952년, 주민들이 성금을 모아 다시 의총과 종용사를 지은 것. 백성의 힘으로 나라를 지키고자 했던 의로웠던 정신은 결국 우리 역사를 지키고자 하는 백성의 마음으로 다시금 살아날 수 있었다. 파란만장했던 삶의 끝, 죽어서조차 한동안 편히 쉴 수 없었던 영혼들. 그들을 기리는 경건한 마음으로 문을 나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