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덕사는 애국지사인 면암 최익현(1833∼1906)선생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면암 최익현 선생은 조선 후기 대표적인 위정척사(조선 말기, 유학자들이 개화에 반대하면서 내세운 말) 사상가이자 항일의병장으로 지난 1906년 전북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본의 침략에 맞서 싸우다 순국했다.
충남 청양군 목면 송암리 171-1 에 위치하고 있는 면암 최익현 선생의 생애와 사상, 정신을 종합적으로 담아낸 면암최익현기념관의 모습이다.면암최익현기념관은 위정척사 사상을 바탕으로 조선 말기 개화 정책에 맞서 상소 투쟁을 벌이고, 국권 침탈에 항거해 의병을 일으킨 뒤 끝내 대마도에서 순국한 조선의 마지막 선비 면암 최익현 선생의 정신을 기리는 시설로 면암의 생애와 사상을 담은 전시실 ‘면암관’을 중심으로, 교육·체험실 ‘별별곳’, 누각형 체험 공간 ‘존심루’, 수장고 ‘대의관’, 관리사무실 등 한식 목구조 건물 5동으로 구성돼 있다.면암 최익현 선생은 화서 이항로 선생의 문하에서 충의 정신을 계승해 왕성한 항일 애국정신을 펼치던 중 1906년 4월 13일 태인에서 의병을 모아 일제에 항전하다 체포돼 대마도에서 1906년 11월 17일 74세의 일기로 순국했다. 면암최익현 선생의 동상과 그 옆으로 백범김구선생 환국고유제문비 가 건립되어 있다.광복 직후 상하이에서 귀국한 김구 일행이 ‘환국고유제’를 올린 곳도 서울 종묘가 아니라 이곳이었다.존심루와 명리지는 화서 이항로 선생이 제작 최익현에게 내려 준 `존심명리(存心明理)` 네 글자에서 따온 누각과 연못이다. 연못 뒤로 모덕사와 면암고택이 있다. 존심명리는 `마음을 보존하고 이치를 밝힌다`라는 뜻이다.명리지 앞에 있는 우목저수지의 전경.면암 선생이 1900년부터 1906년 전북 태인에서 의병 활동을 하기 전까지 청양 고택에서 거주했다. 고택에서 6년간 머물며 후학을 가르치고 충의와 절개의 뜻을 다지며, 선생의 본격적인 의병 활동을 구체화 된 것으로 보여 의미를 더한다.면암고택 우측으로 면암 선생의 유품과 유물을 전시하는 대의관과 서책, 서간문을 보관하고 있는 춘추각의 모습이다.면암고택 사랑채는 구동정사 또는 중화당이라 하였는데 면암선생은 이곳에서 많은 애국지사를 모아 강의하고 독립운동을 논의하여 1906년 의병을 일으키게된 산실이며, 면암선생이 순국한 뒤에도 후손이 계속 살았던 집이다.중화당에 걸린 편액사랑채와 춘추각 사이 뒷편에 `영모재`가 보인다.조상의 위패를 모신 사당채 `영모재`안채의 앞 마당의 모습.안채는 중부지방 양반 가옥에서 볼 수 있는 'ㄱ' 자의 평면구성으로 대청을 중앙에 두고 좌측에 안방, 윗방 그리고 부엌을 뒀고, 우측에는 건넌방과 아궁이가 설치된 고상 마루가 있다.사랑채는 안채를 감싸 안고 있는 형태인데, 중문간으로 한번 꺾어 안채로 진입하는 방식은 전통적 내외관념이 건축적 구성으로 잘 나타나 있는 구조로 평가된다.장독대는 영모재 뒷뜰에 단을 쌓은 곳에 있다.연못에서 보면 면암고택 좌측 깊숙히 모덕사가 자리잡고 있다.지난 1914년 지역 유림이 선생의 충절과 학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이 바로 모덕사다.고종이 최익현 선생에게 내린 '고종 밀유(高宗 密諭)'이다. 이는 1904년(광무 8) 6월 13일 고종이 최익현 선생에게 비밀리에 내린 명령서로 '어지럽고 걱정스러움이 가득한 상황에서 경의 높은 덕망을 흠모한다. 짐이 장차 관직을 마련할 터이니 함께 위기를 구제하라'라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여기에서 나온 '경의 높은 덕망을 흠모한다(慕卿宿德)'는 글이 현재 최익현 선생의 위패를 모신 '모덕사(慕德祠)' 사우 이름의 모태가 됐다.모덕사 좌측으로 영당이 있다.영당(성충대의)은 면암 최익현 선생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는 곳으로 1989년 청양군에서 건립하였으며, 영정은 면암선생이 73세(1905)때 정산 현감으로 있던 채용신이 그렸다.전시관에서는 유배와 상소 투쟁, 항일 의병 활동, 대마도 압송 등 굴곡진 생애를 다루는 한편, 면암고택 사랑방 공간 재현과 문집, 문인록, 민속자료 등 주요 유물을 관람할 수 있었 면암의 철학을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