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6월 8일
남사예담촌에는 파리장서사건의 주역 유림독립운동기념관이 있다. 유림독립운동기념관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 보기로 한다. 파리장서사건의 주역 유림독립운동기념관은 흔히 아는 3·1운동 민족대표 33인과는 별도로 경상도와 충청도의 유림 137명이 1919년 파리평화회의에 보낼 장서를 작성해서 보내려 한 사건이 있었다. 이른바 파리장서사건이다. 당시 유림 대표였던 면우 곽종석(免宇 郭鍾錫, 1846~1919년), 지산 김복한 선생 등 대부분의 참가자들은 파리장서가 일본에 발각되자 옥고를 치르고, 후유증 등으로 목숨을 잃었다. 그들을 기억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 유림독립운동기념관이다. 곽종석 선생은 이 마을 출신으로 다산 정약용 선생 다음으로 많은, 165권의 책을 쓰고 성리학을 집대성한 구한말 대학자다. 마을의 이동서당(尼東書堂)은 그를 기리기 위해 후손과 제자들이 1919년에 세운 것이다.
유림독립기념관 전경
유림독립기념관 입구로 들어서면 2674자에 달하는 파리장서를 그대로 본뜬 동판이 눈에 들어온다. 바로 아래에는 이 파리장서를 한글로 풀이해 둬 내용을 이해하기 쉽다. 파리장서는 3.1운동이 전개된 1919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세계평화회의에 대한민국의 독립을 호소한 독립청원서다. 면우 곽종석 선생 등 전국 각지의 유림대표 137명이 서명했다. 이 글의 마지막은 “차라리 목을 함께 모아 죽음으로 나아갈지언정 맹세코 일본의 노예는 되지 않을 것입니다”라는 굳은 의지를 드러내며 끝맺는다.
면우 곽종석 선생은 1864년 경남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에서 태어나 영남의 대 유학자인 한주 이진상 선생에게 가르침을 받고 퇴계학을 계승한 구한말 대표적인 유학자다. 일찍이 학문에 뜻을 두고 경북 성주로 한주 이진상 선생을 찾아 스승으로 섬겨 성리학에 능한 그의 가르침을 받아 학문을 닦다가 고향으로 돌아왔다. 1895년(49세) 조정에서 경북 비안 현감으로 임명했으나 나가지 않았다. 그해 8월에 민비가 시해되자 일본의 횡포에 분격해 이듬해 봄에 서울에 가서 천하대의를 밝히라는 포고문을 지어 여러나라 공사에 보냈다. 53세 때(1899년) 고종의 부름을 받았으나 나가지 않았으며, 중추원의 의관에 임명되었어도 취임하지 않았다. 59세 되던 해 그는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이 조약의 폐기와 조약체결에 참여했던 을사오적을 처형하라는 상소문을 올렸다.
파리장서운동이란 경상도, 충청도 유림들이 파리평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 조국 독립을 국제사회에 호소하려다 발각돼 많은 유림들이 옥고를 치른 유림독립운동이 파리장서운동이다. 파리장서는 면우 곽종석 선생을 중심으로 영·호남 유림 137명이 만든 독립청원서로 1919년 파리에서 열린 파리강화회의에 보내졌다 해서 '파리장서'로 불린다.
파리강화회의는 1919년 제1차 세계대전 종료 후 영국과 프랑스, 미국 주도로 전쟁에 대한 책임과 유럽 각국의 영토 조정, 전후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프랑스 파리에서 27개국 대표가 모여 조약협상(강화회의)을 벌인 국제회의다. 곽종석 선생이 작성한 독립청원서는 한문체로 우리나라의 유구한 역사를 소개하고 우리민족의 독립의지를 밝힌 동시에 일제의 포악무도한 통치를 폭로하고 있다. 137명의 유림대표가 작성한 전문 2674자에 달하는 장문의 한국독립청원서는 "한국 유림대표 곽종석 등은 파리평화회의에 관계하는 여러 훌륭하신 분들에게 삼가 글을 받들어 올립니다"로 시작된다. 장서에는 "사람이나 나라는 모두 스스로를 운용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므로 남의 통치를 받을 필요가 없다. 한국은 오랜 역사를 지닌 문명의 나라로 스스로 정치할 능력이 있으므로 일본의 간섭은 배제되어야 한다. 일본은 교활한 술책으로 보호를 명목으로 한국을 빼앗으려 하고 있다. 일본의 포악무도한 통치를 참을 수 없어 독립운동을 벌이고 있는 한국의 처지를 만국에 알린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는 당시 유림들이 지식인으로서 평화적인 방법으로 만국공법(당시 국제법)에 호소한 특별한 독립운동으로 평가받고 있다.
당시 곽종석 선생은 영남 유림대표로서 파리장서의 전문을 완성했을 뿐 아니라 김복한 등 전국의 유림과 연합해 파리장서 운동의 선두에 섰다. 3·1운동, 파리장서운동을 일으키게 한 동기는 1910년(경술년) 한일 합병조약이 일본의 강제에 의한 것이라는 점과 고종 황제가 일본에 의해 시해되었다는 점, 국제적 민족자결, 자유주의 사상의 팽배 등에 기인한다. 특히 유림에게 충격적이 있었던 것은 한국유림 명칭을 도용해 일본 정부에 '독립불원서'를 제출한 사건으로, 일본의 간계를 세계에 폭로하기 위해 독립청원서를 내자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이때 서울의 윤충하와 김창주가 곽종석 선생을 찾아와 서울의 정세를 전하고 독립청원서 운동의 대표가 되어 줄 것을 청하자 즉석에서 승낙한다.곽종석 선생은 장서를 지어 제자인 심산 김창숙으로 하여금 만일을 염려해 글을 외우게 하고 파리장서를 한줄씩 오려 짚신날에 감추어 일본의 감시를 피해 가져가기 편하도록 준비했다. 1919년 3월22일 심산 김창숙 선생은 영남과 호서의 유림대표 137인의 서명이 담긴 파리장서를 가지고 출국해 3월27일 상하이에 도착한다. 김창숙 선생은 독립청원서를 영어·독일어·프랑스어·중국어 등 4개 국어로 번역하고 번역된 독립청원서는 임시정부 대표로 파리에 주재하고 있던 김규식에게 전달됐다. 그러나 파리강화회의는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 등 5개국의 힘의 논리에 의해 진행되었고 식민통치를 받고 있는 약소국의 목소리는 그대로 묻혀버리고 말았다 이후 각 고을 향교로 발송한 한문 청원서가 발각되면서 137명의 이름이 알려져 유림대표들이 옥고를 치르고 잔혹한 고문으로 죽거나 처형당했다. 면우 곽종석 선생도 옥고를 겪다가 병보석을 출감해 그해 8월 돌아가셨다. 일제는 이 사건을 유림단사건으로 이름붙였고 이때 보내진 독립청원서는 광복 후 파리장서라고 명명됐다.
유림독립기념관 건물 왼편에는 면우 선생의 생가터에 ‘이동서당’이 자리하고 있다. 이동서당은 유림과 마을사람들이 일제에 굴하지 않고 독립운동에 앞장선 곽종석 선생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것이다. 이동서당 출입문에 ‘일직문(一直門)’이라는 현판을 통해 곧은 기개로 일제의 압력에도 올바른 방향으로 걸었던 그들의 마음가짐을 느껴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