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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 여행

영양 서석지

2021년 7월 21일

영양서석지는 담양의 소쇄원, 완도의 세연정과 함께 조선 시대 3대 민가정원으로 꼽힌다. 선바위와 남이포를 석문이라 이름 짓고 자신의 호로 삼은 조선 선조와 광해군 때의 선비 정영방 선생이 16년간 조성한 공원이다.


서석지를 가기전 잠시 선바위관광지에 들렸는데 코로나19 때문에 그런지 상점은 문이 닫혀 있고 사람들이 없는 썰렁한 조용한? 관광지였다. 반변천과 청계천 두 물길이 합류해 큰 강을 이루는데 이곳을 남이포라 부른다. 남이포에는 조선 세조 때 여진족 토벌에 큰 공을 세운 남이 장군의 설화가 전해진다. 날선 단애를 장대히 치켜세운 선바위 가 인상적이다.
정영방의 부인이 작은 묘목을 가져와 심은 400년 된 은행나무를 토담위에 기와를 얹어 둥글게 멋을 낸 서석지 입구이다. 
입구를 들어서면 경정과 주일재가 사각 연못을 끼고 자리한다. 경정 난간에 기대어 앉아 있는 분(빨간모자의 사나이)이 후손으로 연세가 드셔 말귀를 못알아 큰소리로 대답하여야 한다. 시간이 나면 경정에서 하루 자고 가란다. 말씀은 고마운데.............
정영방은 서석지 북쪽에 네모난 단을 내어 매화, 국화, 소나무, 대나무를 심고 사우단(四友壇)이라 했다. 사우단 뒤로 서재인 주일재가 보인다. 서석지동북 모서리에는 물을 끌어들이는 '읍청거'이 있다.
마당 전체가 연못이다. 정영방이 연못을 조성할 때 땅속에서 나온 기괴한 형상의 돌은 ‘서석’이라 해 그대로 정원석으로 삼았다고 한다. 물 위로 드러난 서석은 60여 개, 잠긴 서석은 30여 개다. 이 서석에는 다들 이름이 붙어 있어 정영방 선생의 서석에 대한 사랑을 가늠할 수 있다. 정영방은 서석에 대해 이렇게 썼다. '서석지의 돌은 속에는 무늬가 있고 밖은 흰데, 인적이 드문 곳에 감춰져 있다. (중략) 마치 세상을 피해 숨어 사는 군자와 같고 덕과 의를 쌓으며 저절로 귀함과 실속이 있으니 가히 상서롭다 일컫지 않겠는가.'
서석지를 자세히 알수 있는 안내도
서남 모서리에는 물이 흘러나가는 '토예거'를 냈다. 
영귀제(귀향을 노래하는 언덕)에서 경정과 서석지의 아름다움을 느껴본다.
정자인 경정은 손님을 맞고 제자를 가르치던 공간으로 서석지의 중심 건물이다. 경정의 경(敬)은 유학자들에게 있어 학문을 이루는 처음이자 끝이다.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해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 경지가 곧 경이다. 퇴계는 경을 도의 관문이고 덕의 기본이라 했단다.
정자뒤로 정자에 올라 가본다.
경정은 6칸 대청과 2칸 온돌이 있는 규모가 큰 정자다.
정영방(鄭榮邦, 1577년 ~ 1650년)은 조선 중기의 학자이다. 본관은 동래이고, 자는 경보(慶輔), 호는 석문(石門)이다. 고조부는 홍문관 응교 정환(鄭渙), 증조부는 생원 정윤기(鄭允奇), 조부는 진사(進士) 정원충(鄭元忠)이며, 생부는 정식(鄭湜), 생모는 안동 권씨로 참봉(參奉) 권제세(權濟世)의 딸이다. 양부는 정조(鄭澡)이며 양모(養母)는 진성 이씨이다. 부인은 전주 유씨로 도승지(都承旨)로 증직된 유복기(柳復起)의 딸이다.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수학하였고 중용(中庸), 대학(大學), 심경(心經)을 배웠다. 29세가 되던 해인 1605년(선조 38)에 진사가 되었는데, 벼슬에 나가려 하지 않고 진성(眞城) 임천동(臨川洞)에 은퇴하여 학문으로 일생을 보냈다. 스승 정경세가 이조판서로 있을때 벼슬을 다시 권장하였으나 고사하였다.(백과사전 발췌)
주일재는 서재다. '주일'이란 '한 가지 뜻을 받든다'는 뜻으로 경을 실천하는 장소가 된다. 마루는 마루에 노을이 깃든다 하여 서하헌이라 했단다.
주일재와 정자사이에 협문을 두어 주거공간으로 갈수 있도록 했다.
경정의 뒤편에는 수직사(守直舍)를 두어 연못을 중심으로 한 생활에 불편이 없도록 하였다.
장판각
1650년 봄, 기력이 쇠해진 정영방은 선영이 있는 안동으로 돌아갔다. 6월에는 감기에 걸렸다. 그리고 7월7일 아들에게 부탁해 머리를 감고 손톱을 깎은 뒤 편안히 운명했다. 74세였다. 텅 빈 골짜기 그윽한 난초여 / 구름 사이로 미인을 바라봄이여 / 해는 함지에 떨어지려 하니 / 푸른 계수나무가 시들고 아름다운 꽃이 마르네 / 시절은 다시 좋아지기 어렵도다 / 밝도다 멀리 떠날 수 없음이여.
서석지는 정영방의 학문과 인생관은 물론 은거생활의 이상적 경지와 자연의 오묘함과 아름다움을 찬양하고 심취하는 심성을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서석지가 있는 야트막한 흙돌담은 마을 구석구석 뻗어 동래정씨 후손 집들을 이었다. 비운 지 오래된 몇몇 집들은 일상을 잃었지만 흙돌담 끄트머리에 태화당고택이 있다. 
1800년대 말, 석문의 후손 정익세(1842-1923)가 지은 집이다.  
 서석지로 들어 가는 마을 길 옆에 연당리 석조여래좌상이 누각에 보존되어 있다.  광배와 대좌를 모두 갖추고 있는 불상으로, 머리와 눈부분이 깨져 있고 광배가 3조각으로 절단되어 있기는 하지만 거의 완전한 상태다. 1979년 1월 25일  경상북도의 유형문화재  제111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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