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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 여행

오일도 생가

2021년 7월 20일

학초정 및 정침에서 소중한 문화재를 방치하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아쉽게 발길을 돌려 오일도 생가를 답사한다. 오일도 생가는 영양읍에서 약 5km떨어진 경북 영양군 영양읍 감천1길 34에 위치하고 있다. 감천마을은 낙안오씨(樂安吳氏) 집성촌인 감천(甘川)마을이 자리한다. '큰 내가 마을 앞을 흐른다'고 감들내, 감내, 감천이라 했다고 한다.

 

31번 국도에서 감천마을 길을 따라 들어 가면 감천마을 안쪽에 자리한 연못 '삼천지' 와 우측으로 오일도 시공원이 나온다. 연못 우측으로 마을주차장에 차량을 주차하고 이정표의 방향을 따라 오일도 생가를 찾아 간다.
감천마을 중간에 자리 잡은 오일도 생가. 항일 시인임을 기리듯 대문 앞에 빛 바랜 태극기가 걸려 있다. 솟을대문을 가진 5칸 대문간이 꽃과 나무들에 안겨 있다. 지금도 사람이 사는 집이라 일상의 자취가 가득하다.
5칸의 대문간채에 부릉이가 대문을 막고 있다.
대문에서 정면을 보면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채 오른쪽에 사랑채가 있다. 사랑채에는 '국운헌(菊雲軒)' 당호와 '한묵청록(翰墨淸綠)' 편액이 걸려 있다. 임진왜란 때 학봉 김성일과 함께 의병활동을 했던 선조 오수눌의 호 '국헌'에 구름 '운'자를 더해 '국운헌'이다. 국화와 같은 절개와 구름과 같은 높은 자유를 뜻하리라 짐작은 되지만 자세한 것은 공부를 하여야 겠다. '한묵청록'은 바른 글을 쓰고자 하는 마음이다. 중문채에 딸린 작은 방은 글방이라 한다. 저 글방에서 오일도가 공부했단다. 
이곳 정기서린 집에서 일제강점기의 시인 오일도(吳一島)가 태어났다. 본명은 희병(熙秉)이다. 아버지 오익휴는 천석의 거부로 오일도는 넉넉한 가풍 속에서 자랐다고 한다. 생가는 고종 원년인 1864년 오일도의 조부인 오시동(吳時東)이 건립했다. 오일도는 1901년에 태어나 14세까지 마을의 사숙에서 한문 공부를 했다. 이후 영양보통학교,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 일본 도쿄의 리쿄대학 철학부에서 공부했다. 그는 대학 시절부터 시를 썼고 1925년 '조선문단' 4호에 시 '한가람백사장에서'로 등단했다.
44칸 한옥이라면 비교적 으리으리한 느낌을 주는 칸 수지만 칸들이 조막만 해 그리 거대하지는 않다. 전체는 'ㅁ'자형으로 경북 북부의 추위를 막기 좋은 구조다. 
후손들이 거주하셔 조심스런 답사가 이루어 진다.
오일도 시공원이 넓게 조성돼 있다. '내 연인이여! 가까이 오렴!' '누른 포도잎' '그믐밤' '코스모스' '가을하늘' 등 그의 시를 새겨 넣은 바윗돌들이 나지막한 둔덕들 가운데 서있다. 흔히 오일도를 애상의 가을을 노래하는 서정시인, 고독과 비애의 시인이라 하지만 그에게 있어 서정은 시대의 절망과 상실을 표현하는 시선이었던 것 같다.
오일도 시공원 입구에는 '지하실의 달' 시비가 있고 그 옆에 시인이 앉아 책을 펼쳐 들고 있다.
오일도는 1935년 2월에 사재를 들여 시 전문지 '시원(詩苑)'을 창간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시 전문지로 이후 우리 현대시의 발전 속도가 빨라졌다고 평가되는데, 그는 '시원'을 통해 많은 시인을 세상에 알렸지만 자신의 시집은 생전 한 권도 출판하지 못했다. 태평양 전쟁의 막바지 즈음에 그는 일제의 통제를 절감하며 낙향했다. 그는 절필하고 긴 칩거에 들었다. 광복 후 다시 상경한 그는 '시원'의 복간을 위해 노력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고 우울로 인한 폭음으로 나날을 보내다 결국 죽음을 맞았다. 45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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