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1월 7일
전주한옥마을은 전주시 풍남동과 교동에 위치해 있다. 이곳에는 한국의 전통 건물인 한옥이 735여 채나 밀집되어 있다. 빠르게 변화는 도시 속에 옛 것을 그대로 간직한 전주한옥마을은 한국의 옛 전통을 맛볼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전주한옥마을을 답사하기전 전주의 상징인 완산칠봉에 올라가 전주시가지를 내려다 보기로 한다.
완산칠봉팔각정. 완산칠봉은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동완산동에 있는 공원으로 전주천 서남부에 7개의 봉우리가 연이어 있어 완산칠봉으로 불린다. 동학농민운동 때 격전이 벌어졌던 장소로, 전주의 대명사로 불리는 산이다.
완산칠봉팔각정에서 바라보는 전주시가지 전경.
완산칠봉에서 남부시장쪽으로 내려오면 곤지산정상이다. 곤지산에서 전주의 남부시장전경과,
한옥마을을 내려다 볼수있다.
1894년 동학혁명군이 전주에 입성할 때 불타버린 500여 호의 가옥 자리에 간이시장이 개설되어 1960년대 후반까지 지속되었다. 여기에 상설점포가 늘어나고 시장건물이 개축되어 현재의 남부시장이 되었다.
전주 풍남문 보물 제308호. 1층은 앞면 3칸, 옆면 3칸이고, 2층은 앞면 3칸, 옆면 1칸으로, 지붕은 겹처마를 둔 팔작지붕이다. 전주부성의 4대문 가운데 남문이다. 1734년(영조 10)에 전주부성을 크게 고쳐 쌓은 전라도관찰사 조현명의 기록에 의하면, 전주부성은 고려 말에 최유경(1343~1413)이 쌓았는데, 1734년에 고쳐 쌓을 때, 남문에는 2층 문루를 세워 명견루라 부르고, 동.서.북문은 단층으로 건립하고서 각각 판동문.상서문.중차문이라는 편액을 걸었다고 한다. 1767년(영조 43)에 큰 화재가 일어나 남문과 서문이 모두 불타버렸는데, 9월에 부임한 전라도관찰사 홍낙인(1729~1777)이 새로 건립하고는 풍남문과 패서문이라고 이름지었다. 당시 홍낙인은 한나라 고조의 향리 이름인 풍패를 따서 풍남문이라고 지었다고 풍남문 상량문에 기록되어 있다. 원래 풍남문 좌우에는 포루와 종각이 있었다고 전하는데, 1978년에 복원공사를 시작하여 1982년에 옹성과 함께 복원하였다.
한옥마을 입구 태조로.
전주 경기전 앞의 전경
전주 경기전 하마비는 임진왜란 후 경기전이 중건되던 1614년(광해군 6)에 처음 세워졌으며, 1856년(철종 7)에 중각되었다. 비석에는 지차개하마 잡인무득입(至此皆下馬 雜人毋得入)이라고 새겨 계급의 높고 낮음, 신분의 귀천을 떠나 모두 말에서 내리고, 잡인들의 출입을 금한다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 경기전 하마비는 여느 하마비와는 다르게 판석위에 비를 올리고 그 판석을 두 마리의 사자(혹은 해태)가 등으로 받치고 있는 특이한 형태로, 단지 하마의 의미로서만이 아닌 경기전 수호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비석의 형태는 다른 곳에서 보기 힘든 특이한 형태여서 조형적인 가치 뿐만 아니라 내용적인 측면에서도 경기전이 어떤 곳인가를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상징물이기도 하다.
전주 경기전 정전은 보물 제1578호. 경기전은 1410년(태종 10)에 창건되었다. 1409년(태종 9)에 태조의 관향인 완산부(전주)에서 태조 어진을 봉안하기를 청함에 따라 경주 어용전(집경전)의 어진을 모사하여 이듬해 경기전을 완공하고 정전에 어진을 모셨다. 경기전의 본래 이름은 어용전이었다. 1412년에 태조진전이라 고쳐 부르게 되었으며, 1442년(세종 24)에 지금과 같이 경기전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예종대왕태실과 비`는 전라북도 민속자료 제26호. 태실이란 임금의 태를 명산에 안치하는 것으로서 그 안에 태를 넣은 항아리를 묻었다. 이 태실은 1578년(선조 11) 전라북도 완주군 구이면 평촌리 태실마을 뒷산에 세웠던 것을 1970년 이곳 경기전으로 이전하였다. 태실의 총높이는 243㎝, 옥신의 둘레 255㎝, 난간 둘레 1,540㎝이며, 난간주의 높이는 108㎝이다. 태실비는 귀부와 비신 이수로 되어 있다.
전주사고는 조선 초기 4대 사고 가운데 하나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 모두 병화로 불타고 4대 사고 가운데 전주사고의 실록만 남았는데, 이는 안의 손홍록의 공이 컸다.
경기전 조경묘는 전주이씨(全州李氏)의 시조 사공(司空) 이한(李翰)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
어진 박물관
조선을 건국한 태조의 어진과 어진봉안 때 쓰였던 가마, 용선, 홍개 등의 의식구를 소장ㆍ전시하고 있다. 태조어진을 비롯해 관련 유물을 영구보존하고, 어진을 봉안하고 보존한 역사를 담아 경기전의 가치를 드높이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
한옥마을의 거리를 둘러 보기로 한다.
전주 한옥마을 표지석
자만벽화마을은 전주 한옥마을과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산언덕에 고즈넉이 자리한 곳이다. 승암산 능선 아래 무수히 많은 가옥이 촘촘히 들어서 있는 이곳은 원래 한국전쟁 때 피난민들이 하나둘씩 정착하면서 형성한 평범한 달동네였으나, 2012년 녹색 둘레길 사업의 일환으로 골목길 40여 채의 주택 곳곳에 벽화가 그려지면서 유명해졌다.
자만마을에는 `이목대`가 있는데,이 비 속에는 목조대왕 구거유지라 새겨져 있는데 고종 황제의 친필이다. 목조는 조선조를 건국한 이태조의 5대조로, 목조가 어릴 때 이 곳에서 진법놀이를 하면서 살았던 유적지로 알려져 있으며, 그러한 내용이 용비어천가에도 나타나 있다. 목조가 당시의 전주부사와의 불화로 이곳에서 함경도로 옮겨간 것이 이성계로 하여금 조선조를 건국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으므로, 이를 하늘의 뜻이라고 여겼다 한다.
오목대는 고려 말 우왕 6년(1380년)에 이성계가 운봉 황산에서 왜군을 무찌르고 돌아가던 중 조상인 목조가 살았던 이 곳에 들러 승전을 자축한 곳으로, 그 후 고종 황제가 친필로 쓴 태조고황 제주필유지비를 세웠다.
오목대에서 바라보는 전주 한옥마을.
전주시 완산구에 있는 조선전기 객사로 보물 제583호이며,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 팔작지붕건물이다. 진남루(鎭南樓)라 이름하는 주관과 그 양측에 매월당(梅月堂) 청연당(淸讌堂)의 두 익헌이 있었고 삼문(三門)과 담장으로 둘러싸인 것이 있으나 현재는 주관과 서익헌, 수직사(守直舍)만이 남아 있다. 豐沛之館(풍패지관)이라 쓴 편액을 건 주관 건물은 장대석을 한벌쌓기한 낮은 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을 세워, 기둥 위에는 창방을 끼고 공포를 주상에만 짜올렸다.
조선시대 호남 최고의 지방 통치기관인 '전라 감영' 앞.
선화당과 관풍각
사진은 `전주 영화의 거리`다. 전주 한옥마을은 당일치기, 1박 2일 등 비교적 짧은 시간에 한 도시를 돌아볼수가 있다. 천년 예향 전주는 역사 문화자원이 인접해 집중돼 있기 때문이다. 한옥마을을 정점으로 경기전(어진박물관), 전주제일성 풍남문, 전동성당, 전라감영, 오목대, 이목대, 전주향교, 풍패지관(전주객사) 등이 반나절 도보로 돌아볼 수 있는 거리에 몰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