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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여행

나제통문

2021년 4월 1일

무주 사선암 가는 길에 무주군 설천면과 무풍면 사이의 석모산 기암절벽을 뚫어 만든 문. 나제통문 주변을 답사한다.

나제통문은 무주 구천동 제1경 나제통문에서 제33경 향적봉 등 구천동의 33 경이 시작하는 곳이다.

 

전라북도 무주군 설천면에 있는 석모산 인근에 기암절벽을 뚫어 만든 통문. 높이 3m, 길이 10m의 인공동굴로 무주구천동 입구에 위치하며 덕유산국립공원에 속해 있다. 윗부분에 '羅濟通門(나제통문)'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으며, 이 지역은 신라와 백제의 국경 관문으로, 과거 통문을 중심으로 동쪽은 신라 땅이고 서쪽은 백제 땅이었다. 나제통문이란 이름은 이러한 연유로 유래되었 신라와 백제 양국에게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점이었다는 사실을 〈삼국사기〉를 통해 추측할 수 있으며, 지금도 이 통문의 양쪽으로 위치한 무풍방면의 이남과 무주방면의 새말은 행정구역상 무주군 소천리에 속하지만 언어와 풍속이 판이하게 다르다고 한다.
나제통문으로 들어 가기전, 입구쪽으로는 구천동에서 흘러 내려오는 계곡물이 흐르고 설천교가 설치되여 있으며, 팔각정과 휴게소및 주차장이 있는 공원이다.
팔각정 넘어 화단에는 목련. 벚꽃. 개나리꽃이 같이 피어 있는 것을 처음 목격하였다. 이런 현상이 과연 좋은 것인지 기후 변화에 꽃나무들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세상이다.
작은 바위산인 석견산 능선으로 본래 설천과 무풍을 오가던 사람들이 넘어 다니던 고갯길이 있었는데, 일제 강점기 때 무주에서 김천과 거창으로 이어지는 신작로를 개설하면서 우마차가 통행할 수 있도록 굴을 뚫었다고 한다. 옛날 신라와 백제의 국경이었다는 유래에서 나제동문(羅濟洞門), 혹은 나제통문(羅濟通門)이라 부르게 되었다. 또, 삼국의 통일전쟁 무렵 신라의 김유신 장군이 드나들었다 하여 ‘통일문'이라고도 불린다. 구천동 33경 중 제1경에 속한다.
공원에는 무주태생인 "김환태문학기념비"가 있으며, 일제강점기 문학비평가인 눌인 김환태 선생의 비평문학의 선구자로 일제강점기 순수문학의 이론체계를 정립하고 계급주의 등으로 경직된 문단에 순수 비평을 싹 틔운 인물로 평가받는다.
의병장 강무경의 동상. "강무경(1878~1910) 의병장"은 전북 무장군(茂長郡) 풍면(豊面) 설천(雪川)에서 출생했다. 당초 한학을 익힌 선비였던 그는 필묵상(筆墨商)을 경영했다고 한다. 1907년 일제가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군대을 해산시키자 전국 각지에서 의병항쟁이 일어났다. 이때 같은 지방 사람인 심남일이 의병을 일으키자는 통문을 보내자 의형제를 맺고, 김율(金聿)의 의병부대에 합류했다. 1907년 김율이 죽자, 심남일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선봉장이 되었다. 그의 부대는 1908년 3월부터 10월에 걸쳐 강진 오치동, 장흥 곽암, 남평 장담원, 능주 노구두, 영암 사촌, 나주 반치, 능주 돌정 등지에서 일본군과 싸웠다. 이듬해 봄부터 전투를 재개하여 3월부터 5월에 걸쳐 남평 거성, 능주 풍치, 보성 천동 등지에서 일본군에 큰 타격을 주었다. 그러나 7월 장성 동치(洞峙)전투에서 일본군에 대패하자, 순종이 내린 해산 조칙(詔勅)에 따라서 부대를 해산했다. 그뒤 풍치의 바위굴에서 은신생활을 하던 중 8월 26일에 일본군에 붙잡혔다. 12월 광주에서 대구감옥으로 이감된 뒤, 32세의 젊은 나이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1962년 건국훈장국민장이 추서되었다.
나제통문 무풍면쪽으로 좌측에는 "열녀경주김씨지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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