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모양성으로 알고 몇차례 답사한 곳인데, 고창읍성으로 명칭을 고쳐 놓았네요. 고창읍성은 조선 단종 원년(1453년)에 왜침을 막기 위하여 전라도민들이 유비무환의 슬기로 축성한 자연석 성곽으로, 나주진관의 입암산성과 연계되어 호남내륙을 방어하는 전초기지로서 국난호국을 위한 국방 관련 문화재로 보존되고 있습니다.
고창읍성으로 들어 가기전 판소리를 집대성한 국악의 개척자 신재효의 고택이 있으며,그가 여생을 마친 1884년(고종 21)까지 기거하였던 동리정사는 1850년대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되며, 그의 아들이 1899년에 중수하였다고 전한다. 당시 안채를 포함한 크고 작은 여러 채의 건물들이 한 곽을 이루었던 것으로 보이나, 지금은 조촐한 초가지붕인 사랑채만 남아 있다.성앞 광장에는 답성놀이 여인상이 있는데, 답성놀이는 성을 밟으면 병이 없어 오래 살고 저승길엔 극락문에 당도한다는 전설 때문에 매년 답성놀이 행사가 계속되고 있다. 사실 깊은 뜻은 이 성곽의 축성 배경이 왜침을 막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유사시의 석전에 대비하는 유비무환의 예지로서 머리에 인 돌을 성안에 쌓아 두고 갔다는 전설도 모두가 호국의 예지를 빛내 주는 이야기들이다.성벽에는 축성에 참여했던 고을 이름과 축성연대가 새겨져 있어 계유년(1453)에 전라 좌, 우 도민들이 모두 참여하여 축성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고창읍성 주출입문 북문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고창읍성 북문의 문루인 공북루이다. 읍성의 정문은 홍예식으로 만드는 것이 보통인데, 고창읍성의 공북루는 주춧돌 위에 문루를 세우고 문을 만들었다. 즉 고창읍성의 정문 격인 공북루는 마치 관아의 외삼문과 같은 형태를 띠고 있는 특징을 지닌다.북문 안으로 들어 서면 바로 옥 이(감옥) 나오는데, 이는 죄수를 바로 이송하려고 관아 근처에 지었습니다. 돌맹이 한개를 머리에 이고 성을 한 바퀴 돌면 다릿병이 낫고, 두 바퀴 돌면 무병장수하고, 세 바퀴 돌면 극락왕생을 한답니다.고창성의 둘레는 1,684m 높이가 4~6m, 면적은 50,172평으로 동, 서, 북문과 3개소의 옹성 6개의 치성을 비롯하여 성 밖의 해자 등 전략적 요충시설이 두루 갖추어져 있습니다.일반적인 다른 읍성들이 해당 고을의 읍내 한가운데 자리한 데 비해 고창읍성은 고창의 진산인 반등산을 에워싸며 축조되었다. 사진은 등양루(동문) 로 이어지는 고창읍성의 전경으로, 높은 성벽을 보면 왜구의 침략에 얼마나 철저히 대비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등양루에서 성 안쪽으로 방향을 틀어 내부 탐방에 나섭니다.성내에는 동헌, 객사 등 22동의 관아건물과 2지 4천이 있었으나 전화로 소실되고, 성곽과 공북루만 남아있던 것을 1976년부터 옛 모습대로 복원해 오고 있다.고창읍성 작청으로, 지방관아의 작청, 또는 질청이라고도 하였는데 이방과 아전들이 소관 업무를 처리하던 청사이다.작청에서 고창객사로 가기전 화사하게 핀 목련단지를 발견한다.고창읍성 객사는 현재 정비공사 중 입니다. 사도와 짝패등 이곳에서 드라마와 영화가 촬영되었답니다.고창읍성에 오면 꼭 맹종죽림에 가서 신비한 소나무를 봐야 합니다.맹종죽림 단지.중국이 원산지인 맹종죽은 일반 대나무보다 몸통이 굵고 키가 큰 것이 특징이다. 울창한 대숲은 보는 것만으로 힐링이 될 만큼 차분한 정경을 연출합니다.독특한 것은 맹종죽림 사이에 자라는 소나무다. 이 소나무의 모습은 대나무를 감싸 돌며 하늘로 솟구치는 듯한 느낌을 준다. 또 이곳은 군주등 영화 촬영지로 이름이 나 있다.오솔길을 따라 고창동헌을 찾아갑니다.고창동헌은 중앙에서 파견된 수령이 정무를 보던 청사로, 건물정면에는 백성들과 가까이 지내면서 고을을 평안하게 잘 다스린다는 뜻의 "평근당"이란 현판이 걸려있다.고창동헌 우측으로 고창내아 가 있는데, 수령이 기거하던 살림집이다.동헌에서 밑으로 내려오면 "장청" 건물이 보이는데, 조선시대에는 지방의 군. 현을 지키는 속오군제도가 있었는데 장청은 속오군의 우두머리인 현감과 병방. 군교들이 군무를 보살피던 청사이다.풍화루로 가면서 장청건물을 올려다 본다.읍성의 가운데에 2층 누각인 풍화루가 들어서 있다. 독립된 건물이면서 객사나 동헌의 외삼문 역할을 한 이곳에서 예전에는 연회를 베풀었다고 한다. 풍년과 고을의 평화를 기원하는 뜻의 현판 풍화루는 독특한 서예 세계를 보여준 석전 황욱(1898~1993) 선생이 92세에 쓴 글씨란다.풍화루 좌측 언덕에 "관청"건물로 지방 관아의 주방에 관한 사무를 담당 하던 곳이다. 이 곳에서는 수령과 그 가족등의 식생활을 비롯한 빈객의 접대와 각종잔치에 필요한 물품의 조달 및 회계 사무를 관장하였다.관청에서 내려다본 전경.풍화루에서 읍성북문으로 내려가다 보면 고창읍성의 약수터 가 나오는데, 음용불가 판정입니다.공북루 우측으로 "향청"이라는 건물이 있는데, 지방의 수령을 자문 보좌하던 자치기구로서 조선 초기에는 유향소라고 하였는데 임진왜란 이후부터 향청이라고 불리워졌다. 향청의 설치목적은 지방의 향리를 규찰하고 향풍을 바르게 하는 등 향촌교화를 담당하였다고 한다.고창읍성만은 나지막한 야산을 이용하여 바깥쪽만 성을 쌓는 내탁법 축성 기법을 사용하였으며, 성문 앞에는 옹성을 둘러 쌓아 적으로부터 성문을 보호할 수 있도록 축성하였다. 또한, 성내에는 관아만 만들고 주민들은 성 밖에서 생활하다가 유사시에 성안으로 들어와서 함께 싸우며 살 수 있도록 4개의 우물과 2개의 연못을 만들어 놓았다.공북루에서 성곽 위에 올라 폭 1m 안팎의 성벽을 걷기 시작하면 한 시간 정도면 한 바퀴를 다 돌 수 있다. 성 밖에서 보면 성벽이 높지만 안에서 보면 그리 높지 않다. 동서남북의 풍광도 제각각이다. 성벽 길을 걷다가 문루나 치성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내려다본 고창읍내와 탁 트인 들판의 풍광이 일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