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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 여행

산청 남명 조식선생 유적지

2024년 4월 19일

지리산자락 산청군 사천면에는 조선 중기의 유학자인 남명 조식선생의 유적지 가 있다. 유적은 두 곳으로 나뉘는데, 산청 시천면 사리에는 산천재, 별묘, 신도비, 묘비가 있고, 시천면 원리에는 덕천서원과 세심정이 있다. 

 

 

 

 

덕천서원 홍살문 안으로 덕천서원 외삼문이 보인다. 덕천서원은 남명 조식 (1501∼1572)의 학덕을 기리기 위하여 그가 학문을 닦던 곳에 세운 서원이다.
조선시대의 서원으로 1974년 2월 16일 경상남도의 유형문화재 제89호로 지정되었다. 남명 조식 선생을 모신 서원으로, 끝내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재야를 지킨 선생의 뜻을 기르고 있다. 서원 정면에는 남명의 사상을 가르치던 ‘경의당’과 좌우에는 유생들의 방이 있다.
정면 5칸, 측면 2칸반인 ‘경의당(敬義堂)’의 모습이다.
경의당 뒤로 제향공간으로 출입하는 내삼문이 있으며,
삼문 안에는 ‘숭덕사(崇德祠)’라 이름한 사당이 있으며,  3칸으로 된 사우로서, 조식의 위패와 최영경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덕천서원 남쪽의 냇가에는 ‘세심정(洗心亭)’이라는 정자가 있는데, 덕천서원의 유생들이 쉬던 곳으로 1585년(선조 18)에 처음 세워다. 옛 선비들이 마음을 정갈히 했다는 정자에 올라 덕천강변 풍경 담으며 차분히 마음을 닦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덕천서원에서 약 2km에 위치하고 있는 남명기념관의 삼문에 왔다.
남명기념관은 조선 중기의 학자 조식이 학문을 닦던 곳으로,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사리에 위치한다. 이곳에는 그의 묘소를 비롯해서 산천재, 별묘, 신도비 및 재실 등이 있으며, 1984년 1월 26일에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기념관 앞 마당 좌측에 조식의 동상과 신도비, 단성소국역비 등이 있다.
좌측의 신도비는 우암 송시열이 지은 것이며, 단성소국역비는 남명 선생의 학문과 사상이 잘 드러나 있다.
기념관으로 들어서면 선생의 생애와 관련 유물, 후학을 기록한 학맥도 등 선생의 발자취를 느낄 수 있는 전시실을 만나게 된다.
남명 조식 선생은 ‘경(敬)’과 ‘의(義)’를 학문의 중심으로 삼았다. 마음을 밝고 올바르게 하는 것이 경이고,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 의다. 남명은 항상 칼(경의검)과 방울(성성자)을 차고 다녔다.
칼과 방울은 “사사로운 욕심이 내장에 티끌만큼만 쌓여도 칼로 배를 갈라 맑은 물에 씻겠다는 뜻에서 검을, 이같은 뜻을 늘 깨우치고자 방울을 차고 다녔다”고 말했다. 임진왜란 때 곽재우 등 남명의 제자 50여 명이 의병장이 된 것도 바로 남명의 실천 유학 덕분이란다.
남명 조식 선생(1501~1572)의 고향은 합천군 삼가면 외토리다.  선생은 61세이던 1561년 거처를 산청 덕산(지금의 시천·삼장면 일원)으로 옮겨 덕천강변에 산천재를 짓고 후학을 양성하는데 힘썼다.
“남명이 1555년 단성(산청)현감 자리를 거부하며 어린 명종 임금에게 올린 단성소(丹城疏)는 강직한 기상을 볼 수 있는 선비문화의 상징이다”라고 설명했다.
남명은 단성소에서 “나라의 근본은 없어졌고 하늘의 뜻도 민심도 떠나버렸다. (중략) 오장육부가 썩어 배가 아픈 것처럼 온 나라의 형세가 안으로 곪을 대로 곪았는데도 누구 한 사람 책임지려고 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명종은 이 글에 진노했으나 주변에서 ‘빼어난 선비’의 상소라고 만류해 화를 면했다.
기념관 우측으로 돌아가면 여재실이 있는데, 여재실은 문중에서 남명 선생에게 제사를 드리는 가묘이다.
기념관 뒤 동산에는 남명 선생 묘소가 있다.
남명 선생 무덤 아래에는 숙부인 은진 송씨의 무덤이며, 정경부인의 산소는 부인의 고향인 김해 산해정 앞산에 있단다.
조식의 묘소는 생전에 선생이 직접 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봉분은 호석을 두르지 않았고, 뒤에는 자연석을 쌓아올린 곡장이 얕게 둘러져 있다. 망주석은 원래의 것으로 추정되나, 상석은 근래의 것이다.
봉분 옆 묘갈명은 한글로 번역해서 새긴 최근의 것이다.
산소 아래에는 과거에 세웠던 비석들을 모아 놓았다.  신도비는 송시열이 비문을 지었고, 이조판서 김성근이 쓴 전액과 이조참판 김학수가 쓴 글씨로 새겨져 있다.
기념관 앞 산천재로 가는 도로가에 '선조대왕 사제문 국역비'가 있다. 남명 선생이 별세하자 선조 임금께서 '나라의 대로'가 돌아가심을 애도하여 쓴 제문을 우리말로 번역하여 쓴 것이다.
산천재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로 구들과 마루가 높은 것이 특징이다. 조식이 처음 이곳으로 옮겨오던 1561년(명종 16)에 만들어졌다. 이 건물은 1584년(선조 17)에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818년(순조 18)에 다시 세워졌다. 벼슬을 마다하고 올곧은 선비를 고집한 조선 전기의 성리학자 남명 조식이 은둔했던 산천재 뒷마당은 지리산 천왕봉이 가장 잘 보이는 곳이라고 한다. 책에 따르면 산천재는 '산속에 하늘이 담긴 집'이라는 뜻이다. 조식 선생이 산천재 뜰에 직접 심은 남명매가 450년이 지금도 여전히 푸르름을 자랑한다.
산천재 우측 뒤뜰에는 조식 남명문집 목판을 보관하는 장판각이 있다.  조선 전기의 성리학자 이고 영남학파의 거두이며, 현실과 실천을 중시하며 비판정신이 투철한 학풍을 수립 한 남명 조식선생의 유적지를 둘러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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