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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여행

함라마을 삼부자집

2024년 7월 6일

호남가의 한 대목을 보면  `풍속은 화순이요 인심은 함열인디, 기초는 무주허고 서해는 영광이라.` 라고 호남의 여러 지명을 넣어 만든 가사가 있습니다. 옛날에 인심이 얼마나 좋았으면 그러겠습니까 이 마을 삼부자는 돈만 많이 번 게 아니라 돈을 쓸 줄 알아 베푸는 데 인색하지 않았으며, 보릿고개나 흉년이 들면 전국 걸인들이 모여들고 소작거리 없는 소작인들은 겨울에 함열로 몰려들었답니다. 이들 삼부자는 이들을 내치지 않고 기꺼이 거두어 들였다. 인심은 함열, 만민이 함열하는 소리가 들린다는 말은 괜히 나온 말이 아니었답니다. 그러나 일제시대 때 함열이 함라라고 지명이 바뀌었는데 아직도 지명을 함라라고 쓰는것이 아쉬운 대목이다.

 

 

 

 

함라마을은 널찍한 들판과 울창한 숲 사이에 들어앉은 그림 같은 시골마을이다. 돌담의 운치가 넘치는 전통마을로, 찾는 이가 드물고 조용하고 한적하다. 비교적 손을 덜 대 옛 마을 분위기가 살아 있다. 1시간 남짓이면 마을 구석구석을 둘러볼 수 있을 정도로 아담하다.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함라면 수동길 8에 위치하고 있다.
함라면 행정복지센터 뒤로 삼부자집 중에서 가장 일찍 지었다는 이배원 가옥 앞에 와 있습니다. 현재 사랑채 일부는 원불교 교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가는날이 장날이라고 이런 표현을 써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첫 집 부터 문전박대를 당한 기분이다. 대문이 잠귀어져 있다. 하긴 여름철 외지인이 들락거리는 것도 집주인이나 구경온 자나 마찬가지로 신경이 쓰일만도 하다.
사실 함라한옥마을의 주인공은 한옥이 아니라 황토색 담장이다. 족히 2km가 넘는 세 부잣집 담장이 이웃집 담장과 함께 황토색 골목을 형성하고 있어 담장만 구경해도 볼만하다. 좌측이 이배원 가옥의 담장이다.
마을 한가운데 자리 잡은 김병순 고택이다. 1922년에 지은 이 고택은 전북에서 제일 크다고 소문난 집으로 세 집 중 유일하게 국가민속문화재에 이름 올렸다. 10여년전에도 내부를 볼 수 없었는데, 현재도 관광객에게 내부를 개방하지 않는다. 담이 높고 문도 굳게 닫혀 있어 집안을 들여다볼 수도 없다. 그래도 길가에 세워진 담만으로도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대문을 중심으로 양편에 굴뚝과 어우러진 점선무늬 회벽꽃담으로 장식 했다.
김병순 고택의 집구조 안내도 다.
말 못할 집안의 내력이 있지만 대문에 걸려있는 안내문을 자세히 보면 굳이 시간을 내어 집 구경을 하고 싶진 않다. 드론도 없지만 함부로 드론촬영을 하였다간 큰일을 치르겠다.
김병순 고택의 행랑채 겸 담장은 족히 300미터 넘어 보이는 바깥담으로 구경만으로 눈이 즐겁다.
김병순 가옥 꽃담 아랫단은 흙돌담, 윗단은 붉은 벽돌로 점선무늬를 낸 꽃담이다. 다른 데서는 구경하기 힘든 인상적인 담이다
김병순고택 정려각.
김병순 가옥 곡선담 꺾어진 곳은 부드럽게 곡선담을 쌓았다. 왼쪽은 붉은 벽돌 점선무늬 꽃담, 직선이 시작되는 오른쪽은 흙돌담으로 쌓아 질리지 않는다
길게 뻗은 키 다른 두 직선담이 보인다. 함라노소로 가는 길고 긴 골목 담이 바깥에서 보면 이렇게 보인다. 김병순 고택(왼쪽) 담장 골목 끝에 보이는 한옥이 함라노소 건물이다.
삼부자집은 만석꾼 김병순, 조해영, 이배원의 가옥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들은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에 엄청난 부를 축적한 지주였다. 당시 전국 90여 명의 만석꾼 중 이 마을에만 3명이 있었던 셈이다. 세 만석꾼 외에도 천석꾼이 4명, 백석꾼은 20여명 더 있었다고 한다. 어머어마한 부자동네였던 셈이다. 웬만한 부자는 이 마을에서 명함도 못 내밀었을 정도다.
함라 노소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아직까지 제 기능을 하는 곳이라고 했다. `노소`는 오늘날 노인들의 쉼터 정도로 취급되는 경로당이 아니라, 마을의 대소사를 결정하고 규율을 관장하는 등 지역 사회의 구심점 역할을 하는 마을 회의체다.
그윽한 정취의 담장을 두르고 있는 흙담, 돌담, 화강암 담장까지 다양하고, 직선과 곡선으로 휘어진 골목마다 느낌이 달라 취향대로 인증 사진을 찍어도 좋을 정도다.
꽃담 향기에 몸 실려 솟을대문 앞에 서면 전북에서 제일 크다는 조해영 가옥이다. 1918년 지은 집이 얼마나 큰지 대문만 열 두개였다. 그래서 붙여진 별명도 ‘열두대문집’이다. 당시 광산이나 농장, 방직회사에 투자해 돈을 벌었다고 한다. 지금은 본채는 헐리고 안채와 별채, 문간채만 남았다.
조해영 가옥 북쪽방향을 두르고 있는 흙돌담을 따라 출입이 가능 한 문으로 가고 있다.
조해영 가옥 사랑채와 고방채의 붉은 벽돌 점선무늬꽃담이 있다. 아랫단은 일반적인 흙 돌담으로 쌓았고, 윗단은 붉은 벽돌로 점선무늬를 냈다. 다른 곳에서는 볼수 없는 인상적인 담이다.
후손이 살고 있는 조해영 가옥은 내부를 개방하고 있어 조심스럽게 들어가 볼 수 있다. 집안에 건물을 경계 짓는 문이 12개나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다섯 채만 남아 있다.
조해영가옥은 익산 김병순 고택, 이배원 가옥과 함께 ‘함라마을 삼부잣집’이라 불린다. 다른 부잣집과 달리 조해영의 선조들은 예로부터 함라마을에 터를 잡고 살아왔다. 조씨 집안의 기틀을 마련한 사람은 조해영의 고조할아버지인 조한기인데, 고종 때 사천군수와 정읍군수를 역임하였다. 이후 조해영의 아버지인 조용규가 막대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1918년 조해영가옥을 세웠다. 조용규는 1923년 함라마을의 다른 부자들처럼 대규모 농장을 설립하였으며, 대륙호모공업 주식 500주를 소유하면서 대주주로서 기업 운영에 관여하기도 하였다.
조해영가옥은 본래 많은 건물이 있었으나 현재는 사랑채, 안채, 별채, 고방채, 대문채로 구성되어 있다.
조해영 가옥 뜰에 서 있는 김육 불망비. 조선 효종 10년(1659), 영의정 김육(1580~1658)이 사망한 이듬해로서 호남지역의 대동법 실시를 여러 차례 건의하고 유언으로까지 임금에게 간절하게 당부한 김육에 대한 고마움을 표시한 일종의 선정비이다. 김육은 조선 인조와 효종 때의 대표적 실학자이다.
사랑채
사랑채와 기억자로 꺽인 형태로 연결된 고방채다. 고방채의 방의 갯수를 보면 이 고택의 재력을 볼 수 있다.
조해영 가옥의 안채 건물 중심으로 정원과 연못까지 갖춘 저택의 규모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넓다.
안채 옆 뒤로 장독대가 있으며, 대문채와 안채 사이에 헛담이 보인다.
조해영 가옥의 솟을삼문 대문채.
조해영 가옥에서 가장 특이한 것은 헛담인 꽃담이다. 헛담은 집안 여성을 위해 안채를 가리는 용도다. 꽃담 바깥벽은 경복궁 자경전의 십장생굴뚝을 본떠 만들었고, 안벽은 붉은 벽돌로 흙 돌담으로 쌓았다.
소담한 연못 넘어로 조해영 가옥의 별채다. 1918부터 지은 건물이어서 한옥에 일본식 요소가 가미돼 독특한 분위기를 풍긴다. 십장생을 표현한 꽃담장과 농장 사무실로 이용했다는 별채가 이 집의 자랑이다.
엄청난 규모의 정원과 연못, 돌담의 흔적은 아직 남아 이 집의 옛 영화를 전하고 있다.
이 집의 특징은 일제 강점기 부농 집안의 생활상을 보여 주고 있으며, 한옥의 변화 과정과 함께 외래문화의 유입을 살펴볼 수 있는 문화 유적이다. 마을 골목은 삼부자집에서 시작해 삼부자집에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해 뜨면 일하고 해 지면 편히 쉬며, 우물 파 물 마시고 논밭 갈아 밥 먹으니, 이 동내는 임금님 힘이 무슨 소용이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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