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1일
시원한 대청호가 한눈에 들어오는 양성산 기슭에 자리한 문의 문화재단지. 1980년 대청댐 건설이 계기가 돼 수몰 위기에 처한 지역 문화재를 보존하고 주민들에게 휴식공간을 제공하자는 취지로 조성됐다. 자연스럽게 우리의 문화와 역사를 배우고, 대청호의 수려한 자연경관까지 만끽할 수 있는 곳이다. 충북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 대청호반로 721에 위치하고 있다.
청주에서 대청댐 방향으로 32번 지방도를 따라가다 보면 대청호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문의문화재단지가 있다. 주차장넘어 양성산이 보인다. 양성산을 등산을 하면서 대청댐 전경을 바라볼 수 있는 팔각정도 있으나, 문의문화재단지만 관람하기로 한다.
주차장에서 단지로 들어가는 길은 단풍으로 물들고 있다.
문의는 조선시대 청주 진관에 속해 있다가 해방 후 청원군을 거쳐 2014년 청원이 청주와 통폐합되면서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이 되었다. 한때는 청주와 버금가는 큰 고을이었다는 문의는 1981년 금강 본류를 가로지른 대청댐이 건설되면서 형성된 인공호수 대청호의 오른쪽 호숫가에 자리 잡으면서 주민의 반이 고향을 떠나 객지로 이주하는 아픔을 겪었다.
문의문화재단지로 들어가는 양성문. 단지는 양성산 자락에 자리 잡고 있다.
옛 조상들의 생활풍습을 알기 위해 양반 가옥, 주막집, 토담집, 대장간, 성곽 등이 고증을 거쳐 건립됐다.
. 단지는 성문을 지나 오른쪽 산자락에 펼쳐져 있었다.
기자석은 마을 입구에 남자의 생식기를 인위적으로 조각하여 세우거나 비슷한 형태의 자연암석을 대상으로 하여 기자나 풍년·풍어·자손만복 등을 기원하고, 질병이나 악신으로부터 자신과 마을을 지켜준다고 믿는 민족고유신앙인 남근숭배의 직접적인 신앙물이다.
문의문화재단지는 ‘청주판 민속촌’으로도 불리는 곳이다. 대청댐 건설로 수몰된 지역의 가옥과 옛 비석 등을 옮겨와 원형에 가깝게 복원했다.
길가에 신동문 시인의 시 '아! 신화같이 다비데군들'을 새긴 돌비가 서 있다. 당대의 현실을 강도 높게 비판해 온 시인은 4·19혁명에 직접 참여한 뒤, "주먹 맨주먹 주먹으로 / 피 비린 정오의 / 포도에 포복하며 / 아! 신화같이 다비데군들"을 뜨겁게 노래했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다윗과 골리앗의 대결을 기본 모티브로 하되, 시인은 다윗(다비데)에 접미사 '군(群)'을 붙여 개인이 아닌, 익명의 군중으로 이를 확대 형상화했다. 1960년대 후반 절필한 뒤 낙향해 있을 때 그는 모친을 잃었고, 조문을 다녀간 동료 시인은 '문의 마을에 가서'를 썼다.
삼거리에 다양한 고인돌이 있다. 내수읍 학평리 고인돌, 문의면 가호리 고인돌, 미원면 수산리 고인돌 등 다양한 고인돌의 형태를 비교해보는 것도 재미다.
고인돌이 있는 삼거리에서 우측으로 올라가면 대장간이 나오는데, 실제 대장장이가 운영하는 대장간엔 칼, 낫 등 제품을 판매한다.
대장간 위로 주막이 있으며,
마주보는 곳엔 기와집과 초가 6개가 들어있는 `저잣거리'가 있다.
저잣거리 윗쪽에 `김선복 충신각`과 중부지방 양반가를 재현해 놓았다. 김선복 충신각은 임진왜란 때 조현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켜 청주성을 탈환하고 금산에서 왜군과 싸우다가 전사한 충신인 의성 김씨 김선복의 충절을 기리어 세운 정려이다.
이 양반가옥은 중부지방의 양반이 살았던 옛가옥을 재현한 것이다. 가옥의 구조는 목조와가로 안채와 사랑채, 행랑채로 크게 구분되고 부속건물으로 안채 뒤편에 가묘와 우측으로 광과 측간을 배치하였다.
양반가옥 쪽문 뒤로 가면 여막이 보인다. 여막은 혼백이나 신위를 모신 자리 옆이나 무덤 가까이에 짓고 상제가 살던 초막이다.
여막안에는 장례문화에 대한 자료들이 전시되고 있다.
양반가옥 우측으로 문의면 옛 비석군이 있으며, 계단위로 올라가면 문산관을 볼 수 있다.
조선 시대 객사로 쓰이던 ‘문산관`은 정면 10칸, 측면 3칸으로 대청댐 건설 때 문의향교로 이전했다가 1997년 이곳으로 다시 옮겼다. 지붕이 좀더 높은 3칸의 정당이 중앙에, 왼쪽에 4칸, 오른쪽에 3칸의 익실을 두었다.
문산과 좌측으로 조경쉼터.
문산관 앞에서 내려다본 중부지방의 양반가옥 문벌이 높은 사대부 가옥에 가까운 건축구조이다.
좌측으로 문의문화재단지의 놀이마당. 자연석을 박아 만든 반원형의 관중석이 길게 이어져 마치 대학의 노천극장 같았다. 문산관 앞에서 내려다보는 대청호 풍경도 들어온다.
놀이마당 좌측으로 중부지방에선 보기 드문 돌너와집(부용민가)이 자리한다. 돌을 판판하게 기와처럼 만들어 지붕을 이은 집으로 이색적인 형태의 지붕이 눈에 띈다. 청주 부강리 고가다.
이 집의 안채는 부용면 부강리 현 세종시의 김종철씨가 살던 고가를 이곳으로 이전 복원한 것으로 ㄱ자 형태의 목조 기와집이다. 건물의 지붕은 얇은 판석으로 덮은 돌기와집이며 중부지방의 산골부락에 많이 있던 형태이다.
고인돌이 있는 삼거리에 `청주 관정리 고가`가 있다. 이 민가는 신방호씨가 살던 가옥을 원래의 모습 그대로 이전복원한 집으로 전형적인 중부 지방의 초가이다.
초가돌담길을 따라 거닐다 보면 비석군이 보인다.
청주 노현리 고가
조선시대 후기 건물로 문의면 노현리 이양훈씨가 살던 가옥을 이축한 것으로 당초에는 강릉김씨 김승지의 종가댁 이었다. 가옥의 구조는 안채가 ‘ㄱ’자 형태의 목조와가이며 광채와 사주문, 측간은 목조초가이다. 광채는 ‘一’자 집이다. 1993년 문의문화재단지가 조성되면서 현위치로 이전 복원하였다.
노현리 고가에서 대청호미술관으로 향하면 중간에 옹기전수관이 있다. 무형문화재 제12호인 옹기장 박재환 옹의 옹기 작품 감상과 무료 체험을 할 수 있다.
옹기관 가마.
대청호미술관에서는 연중 국내외 초대작가전과 개인전, 주제별 작품전 등이 연중 열리고 있다는데, 이번이 세번째지만 한번도 들어 가본적이 없다.
대청호미술관 앞 조각공원에 '애국지사 일곱 분의 상'이 서 있었다.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신규식·신채호 선생을 비롯하여 3·1운동에 민족대표로 참여한 손병희·권병덕·신석구·신홍식, 그리고 한말 의병장 한봉수 선생 등 청주·청원 출신의 애국지사들이시다.
성문앞 좌측으로 유물전시관으로 가본다.
유물전시관에는 낭성면 무성리에 있는 영조대왕태실 조성을 기록한 지방유형문화재 제70호인 영조대왕태실가봉의궤를 비롯해 군내에서 수집한 유물을 전시한 유물관과 백제부터 근대까지 기와를 시대별로 분류한 기와 전시관이 있다.
유물전시관 로비에는 홍수아이의 동상이 있다. 흥수아이는 1983년 충북 청원군 가덕면 노현리의 두루봉 동굴에서 발견됐다. 4만 년 전 현생인류인 '흥수아이'를 복원한 동상이다.
전시실에는 영조대왕태실 조성을 기록한 지방유형문화재 제70호인 영조대왕태실가봉의궤를 눈여겨 볼만한 것도 있다.
구석기 유적지로 알려진 '청원 두루봉동굴'을 재현한 동굴박물관.
1983년 발굴돼 교과서에도 실렸던 '흥수아이' 인골은 키가 110∼120㎝ 정도로, 사망 당시 연령은 5∼6세로 추정된다. '흥수'는 인골을 발견한 사람의 이름이다. 약 4만 년 전(후기 구석기시대) 살았던 것으로 보이는 어린아이 유골인 '흥수아이'와 멸종된 동물뼈, 각종 석기 등 구석기 생활 문화상과 환경연구에 획기적인 자료가 무더기로 발굴됐다. 당시 장례풍습을 엿보게 해 세계적인 주목을 받아 왔다.
전시된 `주역석`은 청주시 남이면 부용외천리에서 수습된 것으로 태극과 팔괘를 중심으로 자연의 생성원리와 솟세를 떠나 맑고 고고하게 살아가겠다는 내용이 담긴 돌이다.
백제부터 근대까지 기와를 시대별로 분류한 기와 전시관이다.
`사람얼굴무늬 수막새` 이 기와는 고신라시대의 것으로 영묘사터에서 수집되었는데, 살짝 웃는 모습에 눈.코.입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어 이채롭다.
고려시대 서민들이 건너 다녔던 ‘문산리 돌다리`
오창 학소리 유적 1호 집자리
문의문화재단지는 전통 양식 가옥과 문화재 등이 두루 재연된 데다 대청호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풍광을 자랑한다. 양반가옥, 주막, 토담집, 대장간 등이 재현돼 전통문화와 조상들의 삶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무엇보다 대청호반이 내려다 보이는 양성산 중턱에 수려한 조경과 어우러져 시민들의 휴식처로 사랑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