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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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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우당 2021년 7월 21일 영양 두들마을에 석계고택과 함께 뜰집으로 유명 한 유우당이 있다. 뜰집이란? 방들이 ㅁ자형으로 배열되고 지붕이 연결된 집을 말한다.
석계고택 2021년 7월 21일 석계고택은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91호이며 조선 인종, 현종때의 학자인 석계이시명(李時明)과 정부인 장계향이 살던 집이다. 이시명은 영덕군 창수면에서 출생하였고 벼슬길에 뜻을 두지않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인조 18년(1640)에 영양의 석보로 들어가 석계 위에 집을 짓고 석계로 호를 하고 가난한 생활을 하면서도 편안한 마음으로 도를 지키며 생활하였다. 정부인 장씨도 효행, 부덕, 학문과 예술이 뛰어나 신사임당에 버금가는 인물로 추앙되었다. 후에 석계선생은 임종을 안동에서 하였으나 정부인은 이 집 석계고택에서 별세하였다.
영양 두들마을 2021년 7월 20일 경북 영양군 석보면 두들마을길 98, 이곳 두들마을은 '언덕 위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1640년 석계 이시명 선생이 병자호란을 피해서 정착한 후, 그 이후에 그의 후손인 재령 이씨들이 집성촌을 이루며 살아왔다. 조선시대 1899년에는 이곳에 국립 병원격인 광제원이 있었다 하여, '원두들, 원리'라 부르기도 하였으며, 마을에는 석계 선생이 살았던 석계고택과 석계 선생이 학생들을 가르쳤던 석천서당을 포함하여 전통가옥 30여 채를 비롯하여 한글 최초의 조리서 '음식디미방'을 쓴 정부인 장씨를 기리는 안동 장씨 유적비, 이문열이 세운 광산문학연구소 등이 있다.
남자현 지사 생가지 2021년 7월 20일 경상북도 영양군을 스쳐 지나갔는 지는 모르지만 목표를 세우고 간적은 한번도 없다. 영양군에는 조선시대 3대 정원 중 한곳인 서석지가 있다는 말에 서석지와 영양군을 관광하기로 한다. 911번 지방도로를 타고 석보면사무소 방향으로 가다보면 지경마을이 나오는데, 도로가에 독립운동가 남자현 지사 생가지가 나온다. 현재 생가지는 보수공사 관계로 주변이 어수선하여 답사하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몇장의 사진을 얻고, 그 분의 숭고한 뜻을 가슴속에 새긴다.
유림독립운동기념관 2021년 6월 8일 남사예담촌에는 파리장서사건의 주역 유림독립운동기념관이 있다. 유림독립운동기념관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 보기로 한다. 파리장서사건의 주역 유림독립운동기념관은 흔히 아는 3·1운동 민족대표 33인과는 별도로 경상도와 충청도의 유림 137명이 1919년 파리평화회의에 보낼 장서를 작성해서 보내려 한 사건이 있었다. 이른바 파리장서사건이다. 당시 유림 대표였던 면우 곽종석(免宇 郭鍾錫, 1846~1919년), 지산 김복한 선생 등 대부분의 참가자들은 파리장서가 일본에 발각되자 옥고를 치르고, 후유증 등으로 목숨을 잃었다. 그들을 기억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 유림독립운동기념관이다. 곽종석 선생은 이 마을 출신으로 다산 정약용 선생 다음으로 많은, 165권의 책을 쓰고 성리학을 집대성한 구한말 대..
이사재 2021년 6월 8일 남사예담촌을 둘러 보던중 이순신 장군과 연관이 있는 이사재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 보기로 한다. 이사재는 이순신 장군이 권율 도원수부가 있는 합천으로 가던 정유년(1597년) 6월 1일에 하룻밤 유숙했던 곳이기도 하다. 이사재는 조선전기 임꺽정의 난을 진압하여 공을 세운 박호원의 재실(齋室)이다. 그리고 오른쪽으로는 예담촌을 한눈에 조망하면서 걸을 수 있는 둘레길이 2.4㎞ 정도가 아름다운 하천을 따라 조성되어 있다.
산청 남사 예담촌 2021년 6월 8일지리산천왕봉 탐방후 남사예담촌에 왔다. 땡볕더위에 지쳐 그냥 집으로 갈까 생각도 했지만 양산도 아닌 우산을 들고 동네를 돌아 보기로 한다. "남사 예담촌" 은 고즈넉한 담장 너머 우리 전통 한옥의 아름다움을 엿볼 수 있어 표면적으로는 옛 담 마을 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내면적으로는 담장 너머 그 옛날 선비들의 기상과 예절을 닮아가자는 뜻을 가지고 있단다.
허삼둘 고택 2021년 4월 17일 함양 허삼둘 가옥(咸陽 許三둘 家屋)은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 금천리에 있는, 일제강점기의 가옥이다. 1984년 12월 24일 국가민속문화재 제207호로 지정되었다. 이 가옥은 당시 진양갑부 허씨 문중의 허삼둘이 그 지역에서 말 께나 하는 윤대홍에게 시집와 친정의 도움으로 지은 집으로 특히 안채의 구성에서는 특출함을 보인다. 당시의 시대상에서 과감히 탈피하여 여성중심의 공간배치와 부엌으로 출입하는 통로가 툇마루를 열고 들어 가는 형식이 특이하며 학술적인 자료로도 중요하다.